박대통령

[스크랩] 비운의 박정희 나무

지와이원 2011. 4. 22. 21:30

비운의 박정희 나무

 

영주대홍수 이후 서천폭포로 하천을 돌릴 때의 기념식수가

삼판서 고택 옆에서 지금도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영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1962년 영주에 대홍수가 났을 때 당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영주의 수해 복구 사업을 하면서 영주의 모습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공회의소 앞을 흐르던 서천을 산을 잘라내어 현 위치로 강물이 흐르게 했던 것이다. 산의 절개지, 영주시 가흥동 서천의 한 자락을 영주사람들은 그곳을 폭포라 불렀다. 박정희 의장은 공사를 준공하면서 62년 3월 30일 그곳에 기념식수를 했다. 지금은 전나무가 20여 미터나 높게 푸르게 자라고 있다. 영주 시민들 중 박정희의장의 기념식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처음에 심을 때는 주목을 심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전나무 또는 소나무라는 사람도 있어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든 그 나무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원한이 있거나, 박정희의 정기를 받으려는 어리석은 믿음으로 나무를 베거나 뽑아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 크게 자라 서있는 전나무는 누가 언제 심었는지 모르나 처음 박 의장이 심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박하식(72, 전 매일신문기자, 영주시 가흥동)씨는 “등산을 위해 자주 산에 올랐다. 당시 박의장이 심은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 정확하게 생각나지는 않지만 전나무 비슷했다. 박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는 나무가 잘 살아 있었지만 79년 10.26으로 사망한 후에는 관리가 되지 않아 아카시아 밤나무 등으로 덮여 잘 자라지 못하다가 죽었다.”고 말하면서 “지금의 나무는 세 번째 심은 나무이다. 처음에 박 대통령이 심었고, 두 번째는 원래 나무가 죽은 후 작은 나무를 심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보니까 굵은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던 중 처음 심었던 나무를 다시 찾아 심을 수는 없어도 그 뜻을 기려 비슷한 수종의 나무를 심고 가꾸어 역사를 보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의장이 나무를 심은 후 35년이 지난 1997년 윤홍욱 새마을회가흥1동 전 협의회장 등 40여명의 회원들이 나무를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관리에 들어갔다.

 

회원들은 97년 6월부터 수개월간 이산 문수 안동 봉화까지 가서 고철 등 폐품을 수집하여 모은 당시 240만원으로 나무 주변을 다듬고 스텐으로 보호 울타리를 치고 국화 등 꽃을 심고 가꾸었다.

 

윤홍욱 전 회장은 “97년 당시 나무는 키가 2미터 정도였는데 다른 잡목 속에서 제대로 자랄 수 없었고 주변으로 길이 나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무심히 주변을 밟고 다녔다. 영주를 변화 시킨 큰 사업의 기념물인 동시에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박대통령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념식수를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당시 회원들은 나무주변에 텐트를 치고 일주일을 지키며 작업을 했다. 박대통령을 존경하는 영주사람이나 외지 사람들이 나무에 절을 하기도 해서 나무 옆에 돗자리를 갖다 두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8년 10월 삼판서 고택과 제민루를 이전 신축하면서 박정희나무에 대한 배려는 없이 버려진 블록과 함께 한쪽에 방치되었다.

 

김성호 가흥1동 예비군 중대장은 “박대통령의 기념식수를 이렇게 방치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 같아 수시로 나무 주변을 돌아보고 청소도 하고 있다.”면서 “삼판서 고택이나 제민루를 이왕에 옮겨 왔으면 박정희나무도 같이 보전하고 알리면 스토리가 있는 좋은 관광지가 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제선 영주시 문화관광과장은 “내년 봄에 진입로 손을 좀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념식수 자리에 대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산을 깎아 물길을 돌리려는 기공식을 할 때 관계자들과 함께 발파스위치를 누를 때 파편이 튀어 박정희 의장의 머리위로 떨어지려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박정희 의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뒹굴어 다치지 않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리에 기념식수를 했다는 것이다.

올해는 박 의장이 나무를 심은 지 48년째, 전나무가 제대로 자랐다면 아름드리로 컷을 테지만, 박대통령이 역사의 부침을 하면서 나무도 함께 부침을 했다. 처음에  심었던 나무마저도 보존되지 못하고 출입하는 길도 없이 삼판서 고택의 담 옆에 쓸쓸하게 비켜 서 있는 나무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지금도 권력과 애환을 함께하면서 영주의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식수란?>

 

영주는 1961년 여름 미증유의 대홍수가 발생했다. 7월 10일 밤부터 11일 새벽까지 5시간 동안 2백mm 이상의 폭우가 내림으로써 제방이 무너지기 시작하여 서천이 범람했고 삽시간에 고지대를  제외한 시가지의 4분의 3이상이 침수 되었다. 영주 관내 다른 면부에서도 도로와 하천 제방 농경지가 유실되는 등 많은 피해를 가져왔다. 이때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군용기를 이용하여 관계자를 대동하고 급히 영주에 도착하여 수해전역을 상공에서 시찰하고 곧 바로 군수실에서 피해상황을 보고 받고 그 자리에서 군사작전 개념으로 수해복구 지시를 내렸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영주수해복구사무소’를 설치하고 통제관에 진해 육군대학장 이성가 소장을, 사무소장에 김재식 공병대령을 각각 임명한 후 육군본부 직할 133공병대대를 구 영주농업고등학교(현재의 영주제일고등학교)자리에 주둔시키고 수해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통제관 이성가 장군은 수해복구의 근본대책을 마련하고 박정희 의장에게 승인을 받았다. 근본대책의 핵심은 수로를 지금의 서천으로 변경하고 하천부지를 시가지로 활용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1962년 3월 30일 드디어 공사를 준공하고 기념식수를 했다. 이튿날인 31일 박정희 의장과 송효진 내각수반, 주한유엔군 사령관, 외교사절단 등이 참석하여 준공식을 했다.

 

 영주지역신문 권석렬 기자 gsr1004@hanmail.net

출처 : 豊友會
글쓴이 : 시보네/54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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