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사진

[스크랩] [기획특집] 영주 대수해 50년, 영주를 바꾸다

지와이원 2011. 7. 19. 18:48

[기획특집] 영주 대수해 50년, 영주를 바꾸다
잊혀졌던 50년전 그날 영주 발전의 발판 마련
[332호] 2011년 07월 12일 (화) 22:03:37 시민신문 영주시민신문

새벽 5시 제방붕괴, 시가지 3분지 2가 침수...14명 목숨 잃어
군장병 투입, 재건주택 신축 및 서천수로 변경 나서


   

   

현재의 영주는 오늘로부터 꼭 50년전인 1961년 7월 11일 시가지 전체가 물에 잠기는 미증유의 대 홍수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 이같은 사실을 아는 지역민들이 많지 않습니다. 당시 대홍수를 겪은 사람들 조차 나이가 들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본지는 이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기고 지역발전의 기틀을 마련해보고자 특집기획 ‘영주 대수해 50년, 영주를 바꾸다’를 준비했습니다. <편집자주>

   

   

1961년 7월 11일 새벽3시부터 무려 5시간 동안 영주시 일대에 약 337mm의 집중 호우가 쏟아지면서 소백산 원류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삽시간에 풍기읍 남원천을 가득 메웠다. 이어 영주읍 시가지를 감아 돌아 흐르는 노도 같은 홍수의 물길은 서천에 이르러 오전 8시쯤 구성공원 불바위 밑 북쪽 제방을 붕괴시키면서 인구 3만 2천명의 영주 시가지의 3분의 2가 완전침수 되는 등 온 시가지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이른바 ‘영주 대수해’의 시작이다.

당시 서천은 지금의 서천교~영일초등학교~구성공원 불바위~영주상공회의소~휴천동 천주교회~꽃동산~남부초등학교 방향으로 흐르던 물길은 하상이 높고 강폭이 좁은 꼬불꼬불한 S자 모양으로 형성돼 있어 한꺼번에 흘러내린 홍수를 감당 못해 강둑이 터진 것이다.

▲ 재앙의 시작, 새벽시간대 삽시간에 잠긴 영주시가지
아침밥을 준비하던 주부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가재도구를 다 버리고 노부모와 아이들을 챙겨 업고 철탄산과 구성공원으로 피신했다.

주인은 가고 없고 빈집에서 헤엄을 쳐 다니다가 지붕위에나 물에 뜬 가재도구 나무토막에 올라앉은 돼지나 닭, 개들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집을 잃고 산에 오른 주민들은 두벌 논매기가 끝난 남산들을 모조리 휩쓸어버린 곡창지대 풍작의 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영주군 수해대책본부는 긴급회의를 열어 물에 잠긴 시가지의 긴급구호를 위해 오전 9시 30분경 당시 원당천(지금은 원리로 물길을 돌렸음) 제방 둑 50m를 끊기로 하고, 긴급히 둑을 잘라 물길을 터서 남산들(지금의 영주역) 방향으로 물이 빠지도록 유도해, 4시간 30분만인 오후 2시가 지나서 물에 잠겼던 영주 시가지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영주군이 집계한 수해피해는 가옥유실 149동, 가옥전파 176동, 가옥반파 416동, 가옥침수 1천971동, 이재민 1만5천319명, 밭 매몰 70정보, 논 매몰 132정보, 전답침수 및 매몰 378정보, 재산손실 4억 원, 도로유실 3개소 800여m, 도로 파손 2개소 203m. 제방파손 1천370m, 창고 정부양곡침수 4천114석, 가축유실 1천479마리 등이었다. 인명피해는 14명이 목숨을 잃었고, 52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 참극을 낳았다.

당시 상황은, 1961년 5. 16 군사혁명을 일으킨 국가최고회의는 7월 11일 영주대수해가 일어나자 혁명 채 두 달이 안 된 상태에서 군사혁명정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정신없이 수해복구대책에 달려들었고, 전 국민들이 호응해 군사정부에 구호의 손길이 줄을 이었다. 따뜻한 동포의 손길이었다.

   

   

▲ 정부의 적극적인 구호활동, 그리고 서천 수로 직강공사
군사정부 및 각 시군 이재민대책위원회에 구호금품이 답지했다. 식량, 의류, 의약품 등이 헬리콥터로 공수돼 왔다.

영주초등학교에 592명 구성공원 공회당, 군청 창고, 제일교회에 수용된 1만여 명의 이재민들에게 하루 세끼의 밥이 공급됐다. 대한적십자사 의료진과 군의관 연세의대 등 각 신문사 구호반이 팔에 “긴급구호”란 붉은 완장을 두르고 속속 도착해 환자 치료와 파리 떼가 우글거리는 수해지역의 방역에 나섰다.

경향신문, 동아, 조선일보 매일신문 등 중아일간지와 지방신문들이 이재민 돕기 구호금품 성금모금에 나서고, 군사정부는 영주출신 대학생에게는 학비 감면과 현역장병에게는 수해복구를 위해 2개월간 특별휴가를 내렸다.

당시 영주에는 수해복구공사 하청을 얻기 위해, 하루를 벌어먹고 살기 위해, 수 백 명씩의 건설공사업자와 목수 미장이 일꾼들이 모여들었고, 여인숙은 잘 방이 없었고, 주민들의 수해복구를 위한 팔을 걷어 부친 망치 소리에 영주는 하루하루 발전했다.

이성가(李成佳)소장이 영주수해지구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이 장군의 안목과 공병단의 설계와 부산지방국토건설국의 참여로 영주 고향 전문인들의 지식의 참여 없이 남원천 수로변경공사와 중앙선 철도 이설공사가 진행되는데 당시 임명제인 이창석 영주군수와 김달조 경찰서장, 남영재 영주읍장(군 출신)은 영주 실정에 어두웠고, 이 장군의 판단과 말 한마디로 공사는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가흥리 산을 절단하는 남원천수로변경공사가 시작됐다. 영주에 다시는 수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가흥리 한절마을 뒷산을 절개하여 물길을 돌리는 서천수로 직강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공사에는 육군 제133공병대대와 해병대 제1상륙사단 공병대 등 군인 700여명이 투입되어 262일 만인 1962년 3월 30일 혁명과업 수행을 위한 역사적인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복구공사의 완료, 지역발전의 서막
영주수해복구공사는 1961년 7월 17일부터 시작되어 연인원 5만1천38명, 예산 5억 6천만 환을 들여 드디어 준공, 준공식이 1962년 1월 3일 상오 10시 신설된 영주공설운동장에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을 비롯 송요찬 내각수반, 각 최고위원과 각 정부장관 및 “버거” 주한미국대사 “멜로이” 유엔군사령관 등 국내외인사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열렸다.

이날 박정희최고회의의장은 옆에 앉은 이성가 소장과 “버거” 주한미국대사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을 돌아보고 “민간공사의 3분의 1도 안 되는 돈으로 그것도 공기를 1년 앞당겨 군이 해냈다”고 만면에 웃을 지었다. 박 장군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고 영주시민들은 아직도 말하고 있다.

이날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남원천 하류변경공사장에서 송요찬 내각수반과 “버거” 주한미국대사, “멜로이” 유엔군사령관이 발파스위치를 눌러 남원천 변경된 물길을 쏟아져 흐르게 했다. 그리고 이어 서천에 새로 놓인 “신영교” 테이프를 끊었고, 하망동에 집단 신축된 615동의 재건수해주택을 돌아봤다.

당시 구호사업현황은, 구호금 3천만 환, 양곡 7천석, 의류 8만점, 부식류 5천 500점, 식사도구 7천300점, 학용품 4만5천점 등이다. 총 공사규모는, 주택 615동, 도시토목 631m 산 절개 32만입방m, 교량 240m, 배수. 취수 문 11개소, 취수사업 및 제방 8천508m, 사방사업 4개 공구 등이다.

당시 부산지방국토건설국의 수해복구공사비 산출액은 23억 환이 소요된다고 발표했으나 5.16군사정부는 군인과 군 장비 투입으로 약 3분의1 값인 5억6천만 환의 사업비로 공사를 완공했다.
*당시 5억6천만 환의 가치는, 금1돈 5,000환 현재 120,000원. 쌀 1가마 5,000환 지금 120,000원. 의사인턴 월급 2,000환 지금 1,100,000원 등이다.

영주시는 5.16군사정부와 수해로부터 발전의 종이 울린 셈이다. 서천유로변경공사로 영주는 수해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신 영주와 구영주로 분리되어 넓은 남산들 논이 대지로 조성되면서 중앙시장 자리에 있던 영주역은 지금의 위치인 휴천동으로 옮겨지고, 영주지방철도청과 영주연초제조창이 영주에 들어서면서 영주시는 인구10만을 바라보는 새로운 면모를 형성하는 도시로 발전했다. 1980년 시로 승격됐다.

▲수해복구의 아쉬움,그리고 남겨진 흔적들
영주를 아끼던 송시익(宋時翼) 선생은 자서전 “내가 걸어온 영주 반세기” 에서 풍수지리설에 의한 영주를, “철탄산은 학(鶴)의 형국이고, 우리는 양쪽 날개에다가 학교(영주여고와 영광여고)를 지었다. 학이 어찌 날 수 있겠는가. 앞으로 영주발전은 애로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남원천 수로변경공사는 지방민들이 영주의 앞날을 내다보고, 그 발전을 성의 있게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뜻에서 남원천 수로변경과 철도이설에 대해 좀 더 높은 식견을 가진 유지들이 머리를 맞대고 후손에게 물려줄 고향을 한번 구상하고 검토하여 당시 이성가 소장에게 건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영주가 발전할 중심부를 철도가 관통해서 삼각지를 형성하고 시가지를 삼분해 버렸고, 역을 중심해서 시가지가 동서로 분리되어 서로 바라보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우회전을 해야 하고, 도로망과 입체교차로, 하수구, 배수로 문제 등 많은 예산을 낭비하고, 건설이 주민들의 개성과 욕심에 미치는 방사선식 도시계획 도로망은 준법정신과 공중도덕의 실현에 거리가 먼, 실효성이 부족한 도시로 형성 됐다. 한 건설업자로 밖에 인정을 못 받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거기에는 나도 책임이 있다.” 고 그 당시 회한을 술회하고 있다.

지금 남원천 물길이 흐르던 서천에는 시민회관과 강변1차아파트 등 주택들이 지난날의 아픈 사연의 역사를 잊은 채 들어서 있고, 서천준공기념식 날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심은 기념식수는 삼판서고택 뒤에 있고, 이성가 소장 수해복구기념 비는 구성공원에 남아 오늘로부터 꼭 50년전 그 옛날을 말하고 있다.

출처 : 禮安(宣城)金氏 인터넷 宗親會
글쓴이 : 叔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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