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례역사

[스크랩] 퇴계 이황과 영주

지와이원 2011. 10. 9. 20:05

퇴계 이황과 영주

 

                                 김태환 /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들어가며

 

현재 영주에는 퇴계(退溪)의 유적과 흔적들이 많아 있다. 퇴계의 영주에서의 첫 인연은 청년기 영주에서 수학(修學)을 시작으로 해서 혼인(婚姻), 임관(任官), 교육, 경향왕복행차(京鄕往復行次) 등으로 인해 곳곳에 그 흔적들을 남겼다.

이미 퇴계가(退溪家)와 영주의 연비연사(緣臂緣査)는 선대로부터 결연(結緣)되었고 퇴계와 그 아들(寯), 손자(安道)가 영주의 의원(醫院)과 거접(居接)을 통하여 수학(修學)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혼인(婚姻)를 통해 그러한 관계를 더욱 공공히 했다.

이후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재임(在任)해 비록 1년을 채우지는 않았지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만드는 등 치적을 남겼다. 또한 당시 영주 군수이던 안상(安?)과 제현(諸賢)들이 영천(榮川, 영주) 최초의 서원인 이산서원(伊山書院)을 건립할 때 많은 자문을 해주는 등 이산서원 건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퇴계는 이산서원이 건립된 후 서원의 기문(記文)과 편액을 쓰고, 우리나라 서원 원규(院規)의 기본이된 ‘이산원규(伊山院規)’를 짓기도 했다. 이밖에도 퇴계는 소수서원의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영주지역에 많은 급문제현(及門諸賢)들을 배출시켰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퇴계의 발자취들을 문인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1600년에 쓴 『퇴계선생연보(退溪先生年譜)』와 퇴계의 9대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이 1087년(순조 8)에 쓴 『퇴계선생 연보보유(退溪先生 年譜補遺)』를 중심으로해서 영주지역에서의 퇴계의 족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퇴계(退溪)의 가계(家系).

 

퇴계 이황(李滉)의 자는 경호(景浩)이고, 퇴계(退溪)는 그의 호이다. 1501년 11월 25일 예안현 온계리, 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식(李埴)이고 어머니는 춘천 박씨였다. 아버지는 퇴계가 태어난 후 7개월만인 이듬해 6월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퇴계는 어머니 춘천 박씨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조부인 이계양(李繼陽)이 예안현 온계리의 경치에 반하여 처음으로 이 곳에 정착하게 되어, 퇴계가 이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퇴계의 아버지 이식은 처음 예조정랑(禮曹正郞) 벼슬에 있었던 의성 김씨인 김한철(金漢哲)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1녀를 두었다. 그러나 3남중 한 아들은 어려서 죽고, 아들 잠(潛)과 하(河) 그리고 딸을 남긴 채 김씨 부인은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다시 춘천 박씨에게 장가들어 아들 4형제(5형제)를 낳았으니 첫째는 의(?), 둘째는 해(瀣), 셋째는 징(澄), 네째가 퇴계 황(滉)이다. 그러니 퇴계는 7남매 6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퇴계의 외가는 예천군 지보면 죽림리 춘천 박씨 가문이었다.

 

2.영주에서 학문을 강구(講究)하다.

 

1) 영천(榮川, 영주)의 의원(醫院)에서 공부하다.<1519년(중종 14) 19세>

『퇴계연보』에서 퇴계의 영주관련 기록은 19세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생이 약관일때 여러 친구와 함께 영주의 의원(醫院)에서 공부하였다. 그때 진사 박승건(朴承建)이 아직 소년으로 『소학(小學)』을 배우고 있었는데 , 선생의 몸가짐을 자세히 보더니 자신이 읽고 있는 『소학』과 합치하므로 「공은 일찍이 소학을 읽은 일이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선생은 웃으면서 「아니요」하였다.

정순목『퇴계평전』지식산업사, 1993

 

영주에 있는 의원에 가서 이업(肄業)하다. (弱冠時 與諸友肄業于榮川醫院.....)

 

권오봉『퇴계가연표(退溪家年表)』려강출판사, 1989

 

『퇴계연보』를 보면 퇴계가 처음으로 공부를 배우기 시작한것은 6세에 이웃의 노인에게 천자문(千字文)을 수학한것이 처음이다. 이후 12세에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고 한다.

그후 19세에 영주의 의원(醫院)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퇴계연보』에서 말하는 의원은 지금의 제민루(濟民樓)로 추정된다. 당시 지방의료기관이 확립된것은 단종 즉위년인 1452년인데 이때 의원에는 각 도에서 교수관을 파견하고 계수관(界首官, 국도변에 있는 큰 고을 원)마다 의원을 설치하여 양반자제를 선발 하여 의서를 교육하던 기관이다.

청년 퇴계가 영주의 의원에서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수없으나 몸이 약한 그가 당시로서는 장수라 할 수 있는 70수까지 누렸다든가, ‘활인심방’과 같은 도인법을 공부하였다는것, 또한 매사에 규칙적이고 위생적인 건강관리를 생활화하였다는 점들을 살펴볼때 「영주 의원」에서의 교육은 퇴계의 삶에서 특기할 사항이다. 이후에도 퇴계는 영주의 의원에서 전별모임을 가지고 손자인 안도(安道)를 보내 의학을 강습(講習)받게 하였다.

 

2)소백산에서『주역』을 읽고 그뜻을 강구하며 침식을 잊다.<1520년 20세>

 

 

『미수기언(眉?記言)』에 의하면 「하루는 선생께서 소백산에서 『주역』을 읽고 있었는데 어떤 늙은 스님이 구두점을 바로잡아주기를 매우 자세히 하였다. 선생께서 그 사람이 정허암(鄭虛庵, 정희량) 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스님은 주역을 아십니까?” 하였더니 그 스님은 “잘모릅니다” 하였다. 재차 묻되 “그대는 정허암을 아십니까?” 하니 “잘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이름은 들어서 알고 그의 행적도 대강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께서 “허암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였더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정 아무개는 여막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으니 불효이고, 군명을 어기면서 도망을 쳤으니 불충입니다. 불효와 불충의 죄는 무엇보다 큰것인데 어?게 무슨 면목으로 다시 세상에 나올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윽고 인사를 하고 가버리니 그가 간곳을 알 수 없었다.」라 하였다.

선생의 수록 가운데 ‘허암이 집의 벽속에다 사초(史草)를 감추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만약 소백산에서 『주역』을 읽고 있을때 늙은 스님과의 문답이 있었다면 이 일에 관하여서도 약간의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위의 일의 사실여부는 준신(準信)할수 없으나 다만 여기에 첨가하여 둘뿐이다.

이야순『퇴계선생 연보보유(退溪先生 年譜補遺)』1807년

 

이글은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퇴계의 9대손)이 1087년(순조 8)에 쓴 『퇴계선생 연보보유(退溪先生 年譜補遺)』의 20세에 실린 내용이다.

이야순은 성호 이익의 글을 준신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성호 또한 이글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19세때의 영주 의원 공부와 20세때의 소백산에서의 주역공부, 21세때의 혼례 등 퇴계에게 있어서 젊은 시절 영주는 남다른 곳임에는 분명했던것 같다.

후에 퇴계는 월천 조목(趙穆)에게 준 편지에서 “내가 젊을때 망령되게 뜻한바 있었으나 학문하는 방법에 어두워 공연히 지나치게 각고하였으므로 몸이 파리하게되는 병을 얻었다.” 고하였다.

퇴계는 『주역』을 이곳 소백산 어느 자락에서 읽고 그 뜻을 연구하며 잠자고 먹는것도 잊어버렸다. 이로부터 건강을 해쳐서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렸다. 이렇듯 영주는 퇴계 학문의 기초가 형성되는데 큰 역할을 한곳으로 볼 수 있다.

 

3. 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다.

 

                            수(琇, 참봉) 女(李滉)- 준(寯) - 安道, 純道, 詠道

허원보(許元輔) -   찬(瓚, 문경동의 사위) - 男(士廉) 채(寀)

                         경(瓊) 男(允廉)

                         근(瑾)-安仁 -彦深(곽재우의 매부) 女(金震)

 

퇴계는 21세인 1521년 영주 초곡(草谷, 사일, 푸실) 출신인 김해 허씨인 진사(進士) 묵재(?齋) 허찬 (許瓚, 1481~1535 , 1501년 진사 )의 맏 따님(퇴계 선생과 동갑)에게 장가를 들었다.

처 외조부는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으로 그는 2녀만 두었는데, 허찬은 그의 맏사위로 의령(宜寧)에서 영주 초곡(草谷)으로 옮겨와 살면서 처부모를 봉양했다. 이런연유로 허씨 부인은 영주의 초곡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퇴계의 처조부는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인데 소과를 거친 선비로 고성에서 의령으로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이다. 그는 의령의 가례(嘉禮)마을에 있는 백암산수가 마음에 들어 이곳에 정착한 후 정자를 지어 김일손(金馹孫), 김굉필(金宏弼), 문경동, 김영(金瑛) 등과 교류하면서 시를 읽고 학문을 강론했다.

퇴계의 장인인 허찬은 바로 허원보의 둘째 아들이었다. 허찬이 문경동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것도 허원보와 문경동의 교분때문이었다. 또한 퇴계가 허찬의 사위가 되었던것은 처 외조부인 창계 문경동과 숙부인 송재 이우와의 친분때문이었다. 그래서 창계는 외손녀인 허씨 부인을 퇴계에게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청풍 군수를 지낸 창계 문경동은 살림이 넉넉하였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재산을 사위인 허찬에게 물려주었다. 허찬의 재산 역시 의령과 영주에 산재하였으므로 매우 부유하였다.(『언행록』권 1) 허찬의 묘는 경남 의령읍 소지동에 있고 외손자 채와 아들 사렴의 묘도 함께 있다. 이는 허찬이 죽은후 퇴계의 처가는 영주에서 의령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허찬이 죽은(1535년 12월 29일) 뒤 다음해인 1536년 8월 퇴계가 의령처가에 가서 허찬의 영정에 곡을 했다는 기록으로 알수 있다.

허씨부 인은 1522년 10월 18일 맏아들 준(寯)을 출생하고, 1527년 11월 차남 채(寀)를 낳고 한 달 후 향년 27세에 돌아가셨다. 허씨 부인은 2남(준과 채)을 두었는데 준의 아들은 안도(상계파), 순도(의인파), 영도(하계파)이다.

퇴계는 3년 후인 1530년 권질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 했다. 퇴계는 자주 처가인 초곡에 들렀는데 퇴계의 초곡(草谷)에 대한 시 한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이 있어 곧 서울로 돌아갈제 영천(榮川)에 이르러 병을 얻어 푸실(草谷) 밭집에서 묵다.

(以事當還都至榮川病發輟行 草谷田舍)

 

젊을때 명심하여 정완(訂頑)을 일삼더니 少日書紳服訂頑

여태껏 배움 아득 얼굴빛만 부끄러워라 至今?學但慙顔

겹겹이 험한곳은 행여나 벗었지만 狂奔幸脫天里險

잠자코 물러오니 한가한 맛 보았구나 靜退?嘗一味閒

얽맨 새도 이따금은 짙은 숲을 의지하고 羈鳥有時依樹木

들의 스님은 곳을 따라 구름에 몸을 붙인다 野僧隨處著雲山

뒷동산 꽃 봉오리 오히려 웃음 짓되 後園化?猶爭笑

어찌 그리 구구히도 병들어야 돌아오는가 何必區區病始還

 

4. 퇴계가(退溪家)와 영주의 인연

 

퇴계가(退溪家)와 영주의 연인접족(連姻接族)을 살펴보면 먼저 퇴계의 처외조부인 문창계는 딸만 둘을 두었는데 맏은 진사 허찬으로 퇴계의 장인이되고, 둘째딸은 생원 장응신(張應臣, 퇴계의 처이모부)에게 출가시켰다. 퇴계의 문인인 과재(果齋) 장수희(張壽禧, 장응신의 아들)는 퇴계의 처이종(妻姨從)이 된다.

선성 김씨 김사문(金士文)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이자 장응신의 사위로 퇴계와는 처서종(妻?從) 동서이다. 따라서 김사문의 아들인 백암 김륵(金?)은 퇴계의 처제종질(妻梯從姪)이 된다.

퇴계의 처남인 진사 허사렴(許士廉)은 딸만 둘을 두었는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맏아들인 박록(朴?)을 사위로 맞았다. 소고는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면서 처남의 사돈(査頓)이기도 하다.

죽유(竹?) 오운(吳澐)은 퇴계의 종자형(從?兄) 오언의(吳彦毅)의 손자이다. 죽유 또한 허진사의 여서(女?)로서 초년과 만년에 영주의 초곡에서 살았다. 이런 이유로 죽유는 허씨부인의 묘갈명을 썼다.

또 퇴계의 백씨 이잠(李潛)의 딸은 문수의 만방리의 생원 민시원(閔蓍元)의 질녀서(姪女?)이고 민응기(閔應祺), 민응록(閔應祿)은 종외손(從外孫)이며 문인이다. 퇴계의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또한 이산의 연안 김씨인 김복흥(金復興)의 사위이기도 하다.

또 고령 박씨 박려(朴?)는 퇴계(退溪)의 손서(孫壻)이고, 그의 부친 박대령(朴大齡)은 친구간이다. 이와 함께 옥천 전씨 전응방(全應房), 전응벽(全應壁), 전응삼(全應參)은 형제간인데 퇴계와는 외계(外系)로 8촌간이었다.

 

5. 풍기 군수를 지내다.

 

1) 풍기 군수 약사.(퇴계 연보에서)

? 1548년 11월 9개월간의 단양 군수에서 풍기 군수에 부임.

? 1449년 신재 주세붕이 지은 백운동 서원 상향축문과 진설도및 홀기를 개정.

? 2월 향교에서 석전을 올림.

? 3월 백운동서원 곁 시냇가에 암석을 끊어 내고 평대(平臺)를 만들어 송,죽,백을 심고 취한 대(翠寒臺)라 명명함.

? 4월 백운동(소수)서원 방문.

풍기 동헌에 대나무와 소나무를 옮겨 심다.(先生竹, 先生松 이라 부름)

이후 풍기 풍악정(豊樂亭) 뒤에 있던 이 대나무를 선생죽(先生竹)이라 함.

(퇴계는 대나무를 옮겨 심은 후 48句의 “군재이죽(郡齋移竹)” 詩 지음.)

? 4월 22일 백운동서원을 방문하여 제생(諸生)들에게 시를 지어 보임.

? 4월 22일~26일까지 소백산 유람.

? 5월 5일 동헌에서 “소백산유록(小白山遊錄)”을 쓰다.

? 조카 재와 김부륜이 소백산 등산을 하려하자 농사철에 등산하는것은 여러 가지 페해가 있고 논쟁과 남의 원망을 살 수 있다하여 중지시켰다.

? 9월 휴가를 받고 고향에 감.

? 10월 중형인 온계 이해를 촉령대에서 이별함.

? 10월 21일 헌관으로 지진 해괴제를 올림.

? 10월 아들 준이 순흥향교에서 참강함.

? 10월 1차 사직상소 올림.

? 12월 심통원 감사에게 백운동서원 사액 상소를 올림.

? 12월 3차 사직상소 올림.

? 세차례의 사임 상소후 면직령이 내리기 전에 임소를 떠남.(1550년 정월)

? 풍기 용천동의 용천사에 모셔져 있던 고려 태조 영정각 보수.

? 1550년 2월에 탈고신 2등의 처분을 받음.

? 학봉 김성일의 기록에 보면 “선생은 여가가 있을때마다 서원을 방문하여 유생들과 더블어 학문을 강론하곤 하셨다.” 고 적고 있다.

 

2) 소백산을 유람하다

 

→ 일시 : 1549년 4월 22일 ~ 4월 26일까지(4박 5일)

→ 장소 : 소백산 일원

→ 참가자 : 퇴계 이황, 민서경, 민서경의 아들 민응기, 종수 스님, 다수의 스님, 종자 등.

→ 안내 : 부석사 주지스님

→ 하산배웅 : 아들 요와 로

→ 유산로

소수서원(1박) 출발 →안간교 → 초암 → 철암 → 명경암 → 석륜사(1박) → 백운암 → 석름봉 → 국망봉 → 중백운암 → 석륜사(1박) → 상가타 → 중가타 → 금당,하가타 → 관음굴(1박) → 박달현 → 소박달현 → 대박달현 → 비로전(비로사) → 욱금동으로 하산.

 

【퇴계가 소백산을 유람하며 명명한 지명】

 

* 주세붕이 초암사 앞의 암석을 백운대(白雲臺)라 명명. ? 청운대(靑雲臺)로 고침.

* ‘산대바위’라는 속명을 자하대(紫霞臺)로 고치고 주변의 무명봉들을 백학(白鶴), 백련(白蓮)이라 이름 지음.

* 상가타 부근의 폭포를 죽암폭포(竹岩瀑布)라고 명명 함.

* 계곡의 넓은 돌에 앉아 비류암(飛流岩)이라 명명 함.

이밖에도 소수서원 취한대(翠寒臺), 송석대(松石臺) 등을 명명했다.

* 송석대는 퇴계가 59세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풍기부근에 큰소나무가 있고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든곳에서 쉬면서「송석대」라 이름지었다. 하지만『영주지』에서는「문순공(文純公, 퇴계)께서 정자(洪亭子)의 남쪽 소나무가 우거진 기슭을 보시고 자못 유정(幽靜)하여 쉴만한곳 이라 하면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을 시켜 대를 쌓으니 마침내 유명한 곳이되었다.」고 적고 있다.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이 읊은 시가 있다.

 

광풍대(光風臺, 석륜사 서쪽에 있음)

                               

                                       - 퇴계 이황

 

아름다운 이름에 마음이 감동하여 美名感余衷

지팡이 끌고 옛 대를 ?았노라 策杖尋古臺

스님말이 주선생(주신재)이 가신뒤론 僧言周去後

놀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하네 遊人莫往來

벼랑이야 사다리로 오를 수 있고 絶壁梯可升

가시덤불은 베어내면 트이련만 荒榛?可開

비 개이어 바람 맑은 곳에 祗恐光霽處

바다를 퍼마실 잔이 없으니 어쩌나 不在南溟杯

좀 물어보리다. 무극옹 님 欲問無極翁

참으로 아는 사람이 정말 누구인지를 眞知竟誰哉

 

*주신재는 “북두칠성을 술잔으로 삼아 남해바다를 퍼마시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詩의 제목 관련

부석사 관련시(선비화, 취원루), 경렴정, 취한대, 죽계서원, 영천 쌍청당, 소백산 유산시, 순흥향교, 풍기동헌(東軒),풍기객관, 죽령, 소혼교, 촉령대, 석륜사(石崙寺), 국망봉,자개봉(紫蓋峯),성천사(聖泉寺), 영천 동헌, 창락역(昌樂驛), 푸실(草谷) 등

*퇴계의 영주관련 시(詩)

* 현재 남아 있는 퇴계의 영주관련 詩는 풍기 군수때 쓴 詩와 1566년 정월 14일 동지중추부사로 명을 받고 영천(영주)에서 사면을 기다릴때, 다음해 명나라의 등극사를 응접하라는 유지를 받고 상경할 때 등으로 주로 퇴계가 서울 왕래시 영주를 거쳐가면서 쓴 詩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영주지역 문인들에게 준 詩도 현재 많이 남아 있다.

 

3)용천사(龍泉寺)에 가서 고려 태조 화상을 참배하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의 진영(眞影)이 풍기 금계리의 용천동(龍泉洞) 마을 금계봉기슭의 용천사에 약200년 동안 봉안되어 있었다. 고려사의 1380년(우왕 6) 여은현(如恩縣,문경시 가은현) 양산사(陽山寺)에 안치했던 태조의 진영을 순흥으로 옮겨두었으니 이것은 왜적의 침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용천사는 고을의 북쪽 7리쯤에 있다. 고려 태조 진영이 문경 양산사에서 이곳에 옮겨 봉안 했다고 적고있다.또 풍기군지에는 군수 임제광(林霽光)이 용천사에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했으나 얼마아니하여 화재를 만났는데 영정은 온전했다고 적고있다.

이후 1549년(명종 4) 풍기 군수 이황 이 용천사에 가서 태조의 화상을 참배했다. 화재 후 진영은 작은 궤속에 담아 보관하였는데 스님들이 받들어 보호할줄 몰라서 그것을 목침으로 사용하여왔다.

이에 퇴계는 하늘이 낸 사람을 이처럼 함부로 모독하는 것을 참지못하여 장차 용천사 스님들에게 한칸 집을 마련하여 봉안하라고 하였으나 집이 완성되기전에 군수직을 사퇴하고 돌아왔다.

이후 퇴계는 용천사에 사당을 지어 스님들에게 지키라고 하였을 뿐 제사를 지내라고 한것이 아닌데 조정의 대간(臺諫)에서는 “지난 왕조의 임금의 제사는 ‘흥멸계절(興滅繼絶, 새로 일어난 왕조는 계승하나 사라진 왕조는 멸절한다는 도리)’의 도리가 있는데 풍기 군수 이황은 일개 군수로서 멋대로 이렇게 하였으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고 하면서 퇴계를 탄핵하려하였으나 이를 말리는 사람들이 있어 논의에 그치고 말았다.

1576년(선조9) 유성룡의 건의로 용천사에 사신을 보내어 마전현(麻田縣) 숭의전(崇義殿)에 옮겨 봉안하였다.

용천사의 중창에 대해서 ‘희방사유지(喜方寺遺誌)’에서는 풍기의 세력가인 귀미각간(貴彌角干)의 종 욱면(郁面)이 성심으로 염불하다가 천정을 뚫고 공중으로 올라가자 귀미각간이 자기집에서 도인(道人)이 났다하여 절을 만들어 천왕사라 했다.

뒤에 용천사라 고쳤으니 지금의 풍기 북쪽 15리에 상거한 용천동에 있었다. 지금의 풍기 용천동 마을도 이 용천사에서 따온 지명이다.

 

4)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으로 만들다.

 

신재 주세붕이 떠난지 4년뒤인 1548년(명종 3)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백운동서원을 수시로 방문하면서 서원을 공인화 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1549년 12월에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올린다.

1550년(명종 5)에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 내사본(內賜本)과 명종의 어필 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에도 퇴계는 자주 서원의 유생과 풍기 군수, 영천 군수 등에게 글을 보내 소수서원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졌다.

이로서 소수서원은 퇴계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인된 사학기관의 효시가 되어 서원발달에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수서원의 사액은 풍기 군수 퇴계 이황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퇴계의 상소문 >

풍기군수 이황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배하여 관찰사 상공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 엎드려 생각하오니, 이 고을에 백운동서원이 있는데, 전 군수 주세붕이 창건하였습니다. 죽계의 물이 소백산 아래에서 발원하여 옛날 순흥부의 한가운데로 지나니, 실은 유학계의 선정 문성공 안유가 옛날에 살던 곳입니다.

마을은 그윽하고 깊숙하여 구름에 잠긴 골짜기가 아늑한데, 주후는 군을 다스리는데 있어 특히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아 이미 향교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던 테에, 죽계는 선현의 유적이 있는 곳이므로 나아가 터를 잡고 서원을 지으니, 무릇 30여간이나 되었습니다.

문정공 안축과 문경공 보를 배향하고, 당재와 정우를 그 곁에 건립하여 유생들의 노닐고 강독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땅을 파다가 그 속에 묻혀 있던 동 몇 근을 얻어 <그것으로> 수 많은 「경사자집」을 사서 간직해 두고 식미제도와 섬학전을 두어 군중의 여러 생원들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며, 선비 김중문에게 그 사무를 맡도록 하고, 학도를 불러모으니 사방에서 모여들었는데 권장하고 교도함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대저 서원의 명칭은 옛날에는 없었던 것이, 일찍이 남당시대에 이발의 옛 터인 여산의 백록동에 나아가 학궁을 창립하고, 스승과 생도를 두어 가르치며 이를 일러 국상(國庠)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서원이 시작된 유래입니다.

… 무릇 중앙의 수도로부터 지방의 고을에 이르기까지 서원이 없는 곳이 없었는데, 서원에서 취할 이점이 무엇이었고, 중국에서 서원 숭상이 그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은거하여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학을 강명하고 없을 익히는 무리가, 흔히 세상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싫어하여 많은 책을 싸 짊어지고 생각하기 한적한 들과 고요한 물가로 도피하여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고요한 중에 천하의 의리를 두루 살펴서 그 덕을 쌓으며 인을 익혀 이것으로써 낙을 삼는지라, 그 때문에 서원에 나아가기를 즐기니, 저 국학이나 향교는 중앙 또는 지방의 도시 성곽 안에 있어서, 한편으로 학령에 구애됨이 많고, 한편에는 번화한 환경에 유혹되어 뜻을 바꾸게 하여,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어찌 그 공효를 <서원과>같이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선비의 학문이 오직 서원에서 득세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현명한 이재를 얻는 것도 또한 반드시 이 서원에서 구하니 저 국학이나 향교보다 우월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동국의 교도하는 방법은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서, 중앙에는 성균관과 사학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으니, 가히 좋은 일이라고 하겠으나, 유독 서원만은 설치하였다는 말을 아직 들은 바가 없으니, 이것이 우리 동방의 큰 결점입니다.

<그러다가>주세붕이 비로소 서원을 창건할 적에 세상에서 자못 의심하고 괴이히 여겼으나, 주세붕의 뜻은 더욱 독실하여져 무리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비방을 극복하여 이 전례에 없던 장한 일을 단행하였으니, 아아, 하늘이 혹시 이로 말미암아 서원을 세우는 가르침을 동방에 일으켜 <우리 동방으로>하여금 중국과 같게 하도록 하는 것인가 합니다.

그러나 황이 넌지시 생각하건대, 가르침이란 반드시 위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통달한 연후에라야 그 가르침이 뿌리가 있어서 가히 오래토록 계속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근원이 없는 물이 아침에 가득하다가 저녁에 빠짐과 같을 것이니 어찌 능히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인도하는 바는 아래에서 반드시 따를 것이요, 임금이 숭상하는 바는 한 나라가 사모하나니, 이제 주세붕의 창건이 비록 진실로 거룩하고 안공의 이룩해 놓은 바가 또한 심히 완벽하고 빈틈이 없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만 한 군수나 한 방백의 업적일 뿐이니, 일이 임금의 명령을 거치지 않고 이름이 국가 문서에 실리지 아니하면, 곧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의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이 의심하며 괴이히 여기는 것을 진정시키는 한 나라의 본받을 만한 제도가 되지 못하여 영구히 전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

《고전국역총서》v.20 민족문화추진회, 1985, 『퇴계집』Ⅰ, 書(一) 上沈方伯

豊基郡守李滉 謹齋沐百拜 上書于觀察使相公閤下 … 伏以郡有白雲洞書院者 前郡守周侯世鵬所創建也 竹溪之水發源於小白山下 流經於古順興廢府之中 實斯文先正安文成公 裕之故居也 洞府幽邃雲壑窈窕 周侯之理郡 尤以興學育才爲先務 其拳拳於鄕校 又以竹溪 是前賢遺迹之所在 乃就相其地營 書院 凡爲屋三十餘間 有祠廟以奉享文成公 以安文貞公軸文敬公輔配之 而旁立堂齋亭宇以爲諸生遊處講讀之所 掘地得 銅若干斤 貿經史子集百千卷以藏之 給息米置贍田 使郡中諸生員主其事 郡士金仲文幹其務 招集學徒四面而至 勸奬誘掖不遺餘力 … 夫書院之名古未有也 昔南唐之世 就李渤舊隱廬山白鹿洞 創立學宮置師生以敎之謂之國庠 此書院之所由始也 … 夫自王宮國都以及列郡莫不有學 顧何取於書院而中國之所尙如彼何哉 隱居求志之士 講道肄業之倫 率多厭世之 競 抱負墳策 思逃於寬閒之野 寂寞之濱以歌詠先王之道 靜而閱天下之義理 以蓄其德以熟其仁以是爲樂故 樂就於書院 其視國學鄕校在朝市城郭之中 前有學令之拘  後有異物之遷奪者 其功效豈可同日而語哉 由是言之 非惟士之爲學得力於書院 國家之得賢亦必於此而優於彼也 … 惟我東國迪敎之方一遵華制 乃有成均四學 外有鄕校可謂美矣 而獨書院之設 前未有聞 此乃吾東方一大欠典也 周侯之始建書院也 俗頗疑怪而周侯之志益篤 冒衆笑排 謗而辨此前古所無之盛擧 噫天其或者由是而興書院之敎於東方 使可同於上國也 雖然 滉竊以爲敎必由於上而達於下然後 其敎也有本而可遠可長 不然如無源之水 朝滿而夕除其能久哉 上之所導下必趨之 一人所尙一國慕之 今夫周侯之所作雖信奇偉 安公之所成亦甚完密 然此特一郡守一方伯之爲耳 事不經 宣命名不載國乘 則恐無以聳四方之觀聽 定衆人之疑怪 爲一國之效法而傳於久遠也

 

<소수서원의 사액>

 

영의정 이기, 좌의정 심연원, 우의정 상진,…등이 의논드렸다.

“풍기(豊基)의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은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周世鵬)이 창립한 것인데,【주세붕이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 이 서원을 창립하였다.】 그 터는 바로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본래 이름은 향(珦)이었는데 어휘(御諱)를 피하여 유라 하였다.】 살던 곳이고, 그 제도와 규모는 대개 주 문공(朱文公)이 세운 백록동(白鹿洞)을 모방한 것입니다. 무릇 학령(學令)을 세우고 서적(書籍)을 비치하며, 전량(田糧)과 공급의 도구를 다 갖추어서 인재를 성취시킬 만합니다. 이황(李滉)이【이황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주세붕의 뜻을 훌륭히 여기고, 오래 전승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에 사연을 갖추어 계문하였기 때문에 삼공과 해조에게 명하여 의논하도록 한 것이다.】 편액(扁額)과 서적·토지·노비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다 따라줄 수는 없으나 편액과 서적 등 2∼3건만이라도 특명으로 내려보낸다면, 먼 곳의 유생들이 반드시 고무 감격하여 흥기할 것입니다.…”

《 명종실록》권10 명종 5년 2월 11일(병오)

領議政李  左議政沈通源 右議政尙震…議 豊基白雲洞書院 黃海道觀察使周世鵬所創建 其基乃文成公安裕所居洞 其制度規模 蓋倣朱文公白鹿洞之規也 凡所以立學令置書籍田糧供給之具 無不該盡 可以成就人材也 李滉之請賜扁額書糧臧獲不可盡從 而扁額及書籍二三件 特命下送 則遠方儒生 必鼓舞欣感而興起也…

 

<소수서원에 서책 하사를 청함.>

 

설경(說經) 안수(安璲)가 아뢰었다.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 소수 서원(紹修書院)이 있는데, 이는 고려 사람 안유(安裕)가【안유(安裕)의 초명은 향(珦)이며 죽계인(竹溪人)으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죽계는 지금 풍기군에 속해 있다. 동지사(同知事) 주세붕(周世鵬)이 그 고을 군수로 있을 때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또 그 곁에 서원을 지어 유생들로 하여금 모여서 학문을 닦게 하였다.】 살던 고장입니다. 도내의 유생들이 모두 모여들어 마치 주문공(朱文公)의 백록동(白鹿洞)과 같습니다. 그런데 뜻 있는 선비들이 제반 서책을 박람하고자 하나 궁벽한 시골이라 서책이 귀하여 선비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서책을 간행할 때 한 질씩 반사(頒賜)하소서.”…

《 명종실록》권13 명종7년 3월 28일(경술)

說經安璲曰 慶尙道豊基郡紹修書院 高麗人安裕之故居也 一道儒生濟濟相聚 如朱文公之白鹿洞 有志之士 欲博覽諸書 而窮鄕下邑 簡冊希罕 必貽有志之嘆 請於印冊之時 各頒一件…

 

5)평민 제자 배순과의 인연.

 

배순(裵純, 일명 點)은 조선(朝鮮) 명종(明宗) ? 선조(宣祖) ? 광해군(光海君)의 3대(三朝)에 걸쳐 생존했던 인물로서 소수서원 인근 마을인 배점리(裵店里)의 수철장인(水鐵匠人, 대장장이)이었다.

그의 나이는 퇴계(退溪)가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재임할 당시에는 16~17세, 퇴계가 별세했을 당시에는 37~38세, 선조의 국상시(國喪侍)에는 75~76세, 사망했을 광해군 당시에는 78세 정도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평민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퇴계가 풍기군수로 재임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강학(講學)할 때에는 꼭 공손히 뜰 아래 무릎을 꿇고 참가하였으나 그의 이해능력을 기특하게 여긴 퇴계가 다른 제자와 함께 가르쳤다.

그는 천성이 순박하고 근면하며 평생 망언을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1년 후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삼년복(三年服)을 입었고 철상을 만들어 기리는 등 제자의 예를 다하였으며, 선조(宣祖)의 국상(國喪)에도 삼년복을 입었다고 한다. 문인록에도 이름이 올라있다.

 

6)퇴계와 촉령대(矗?臺)

 

1549년 9월 충청 감사로 있던 온계와 풍기군수로 잇던 퇴계는 각각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고 10월 퇴계와 온계는 풍기관아에서 3일을 묵고 다음날 이별을 고한다. 이때 온계의 심정은 다음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가고 온던길에 사흘을 묵었던 풍기고을에서

촛불 밝히고 가야금 들으며 지새우는 밤

술잔 들고 바라보는 춤추는 풍죽(風竹)을 웃지나 말게

벼슬 길의 이별하는 괴로움이 많기도 하네

 

                                                        -온계집(溫溪集)-

 

 

퇴계는 온계를 촉령대(矗?臺)에서 송별한다. 촉령대는 죽령의 요원(腰院)아래있는데 퇴계는 이곳에서 항상 온계를 작별하곤 했다. 퇴계는 이곳의 동쪽의 대를 잔운대(棧雲臺), 서쪽의 대를 촉령대(矗?臺), 동서대의 협곡을 안영협(雁影峽), 이 골을 건너는 다리를 소혼교(消魂橋)라 명명했다.

처음에는 이곳을 잔운(棧雲)이라했는데 뇌계 유호인(兪好仁)의 ‘백반잔운변(百盤棧雲邊)’이란 ‘죽령행(竹嶺行)’ 이라는 가져와 불렀느나, 뒤에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운근촉촉수령령(雲根矗矗水??)’이라는 두루산(頭流山) 싯구에서 촉령(矗?)을 가져와 촉령대(矗?臺)라 불렀다. ‘안영(雁影)’이라는 이름은 두보(杜甫)의 ‘홍안영래연협내(鴻雁影來連峽內)’에서 가져왔으며, ‘소혼(消魂)’이라는 이름은 강엄(江淹)의 「별부(別賦)」가운데 ‘암연소혼자유별이기(?然消魂者惟別而已)의 구절에서 취하여 명명했다.

퇴계의 ‘금대임서(琴大任書)’ 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처음 대의 이름을 ‘잔운’이라 한것은 유호인의 시어를 취한것이었으나 다시 생각하니 ‘잔’은 ‘잔도(棧道, 험한 낭떠러지와 낭떠러지 사이에 다리를 놓은듯 낸 길)’로서 대(臺)의 명칭으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보아 다시 점필재의 시어 가운데 ‘촉령’으로 하였는데 대와 주변경치가 거의 맞아 떨어진것 같았다. 또 안영협과 소혼교가 있다. 이들 명칭은 모두 선생께서 명명하신 것으로서 그날의 이별하는 회포를 나타낸 것이다.」

 

이날 형제는 소혼교에서 이별하면서 온계는 풍기군수를 떠나려는 동생 퇴계에게 “ 너는 군(郡)을 떠나지 말아라.”하였고 퇴계는 “ 명년(明年)에 제가 다시 여기와서 술잔을 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것이 퇴계와 온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온계는 다음해인 1500년 이기(李?)의 무리들의 무고로 갑산으로 귀양가던중에 양주에서 병사한다. 이날 두 형제는 이별한후 다음날 퇴계는 이별의 아품을 담아 시 2절(絶)을 지어 온계에게 보냈고 온계 또한 퇴계의 시를 차운하여 퇴계에게 보내온다. 먼저 퇴계의 시를 보면

 

천지 개벽할 때 축대를 만들어서

우리 형님 감사 행사 맞이하고 보내노라

영령한 물 소리는 반가운 정 넘치는 듯

우뚝 솟은 봉우리는 이별의 한을 쌓는구나

안영협 이 골에서 나누어진 두 그림자

소혼교 위에 애끊는 그때 심정

굽이굽이 험한 재를 부디 잘 넘으시고

명년에 다시 오실 기약 저버리지 마십시오

온계도 퇴계의 시에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귀신이 돌을 날라 층대를 쌓았던가

밤새 완성하여 우리오기 기다렸네

하늘이 감춘 절경 눈여겨 살펴보니

잠시동안 깨고 쪼아 흰구름을 쌓는다

지는 해는 뉘엿뉘엿 발걸음을 재촉하고

소혼교 다리위에서 술끝나도 못 떠나네

운산아 너 정말 내 말 들었겠다

명년 이때 우리 형제 다시 오기 기다려라.

이후에 다시 온계는 이별의 정을 달래기 위해 퇴계에게 시를 보내고 퇴계는 이에 다시 차운한다.

 

철행을 전송하여 멀리 오르니

수풀이 우거지고 골짜기 깊다

잔운대 새로 쌓아 백자나 높고

안영협 처음 틔워 천 길도 깊다

이별 술은 다해도 정이 끝없고

떠나는 듯 무궁한데 해지려하네

말을 머뭇거리고 뒤돌아보니

바람소리 시냇물 소리 모두 슬프다. (온계의 시)

 

만나자 벌써 떠날 가한이구려

이별하는 술자리에 호소가 깊다

인사(人事)는 백년인데 모임 어렵고

대(臺) 이름 천고이나 처음 찾았다

도구 계획 무디어도 노후에 좋고

환해(宦海)에 노는 몸 빠지지 마소

체악(??)이 갈라져서 영(嶺) 너머인데

보내온 시(詩) 삼복(삼복,세차례)하며 길이 읊는다.(퇴계의 시)

 

이후에도 퇴계는 촉령대를 잊지못하는데 퇴계의 이러한 심정은 퇴계가 뒤에 금계 황준량에게 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자연을 매우 좋아하는 성품인데

그 가운데도 촉령대를 가장 좋아하네

안영협 위의 촉령대는 예 대로 있는지

꿈속에서 조차 자주 그곳을 ?아본다네

 

■ 온계(溫溪)와 퇴계(退溪)의 죽령(竹嶺) 시(詩)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 오는데 죽령에 도착하였다. 그때 가을 경치가 한창 짙었기에 말위에서 절구 한수를 읊조리다. 【온계(溫溪)】

 

단풍숲 푸른 석벽(石壁) 채병(彩屛)같은데

시냇물이 석대(石臺)를 안고 흐른다

바쁜 길을 가까이 해서

발자취가 창대에 옥적 없었다

 

차운(次韻) 幷序

 

전일 가형(家兄)을 따라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죽령에 도착하였다. 그때 가을 경치가 한창 무르익었고

형님께서 말위에서 절구 한 수를 읊조리시었다. 그후 나는 단풍과

시냇물을 만났을 적마다 문득 이 시를 외우는데 애오라지 화답해서

회포를 푼다. 형님은 지금 은대(銀臺, 승정원)에 계신다.

                                                                      【퇴계(退溪)】

 

 

7)풍기 군수 퇴계에 대한 평가

 

학봉 김성일은 퇴계의 풍기 군수때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들은 퇴게 선생이 전임 군수인 주세붕만 못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주세붕은 정치를 하는데 자못 술수를 써서 고을 전체 백성들의 마음이 쏠리도록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다만 지극한 정성으로 야단스러움없이 한결같이 올바르게만했으며, 향리들이나 백성들을 대하는데도 한결같이 정성과 믿음으로 그들의 술수를 받아들이지않았다. 사람들은 하루의 계획은 부족하나 일년의 계획은 여유가 있게 되는 ?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또 이야순은 『연보 보유』에서 「고을을 다스릴때는 간편하고 번거롭지 않게하였다. 백성에게 세금이나 부역을 매길때는 매우 가볍게 줄이고자 하였으나 백성이 마땅히 내야할것은 증감함이 없었다. 원칙에 벗어나게 표창하는 일도 없었다. 사민을 대하기를 한결같이 정성과 믿음으로 하였으니 그들이 거짓을 저지르지 못하였다. 선생이 떠나오려할 때 선비들은 그의 가르침을 생각하였고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사모하여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마저 있었다. 행리는 맑는 바람처럼 산뜻하여 한점 개인적인 누가 없었다. 책을 실은 나무로 된 고리짝이 집에 당도하자 관물이라하여 싣고온 관졸에게 돌려보냈다.」

퇴계는 이렇듯 풍기군수 제직시 다스림에 있어 번잡하지 않았으며 한결같이 원칙을 적용하였다. 또한 치적을 쌓기 위해 무리도 하지않았다.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할 의무에 대하여 더하거나 감해주는 법이 없었다. 퇴계는 현실의 실무를 요령있게 처리하여 백성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는것보다 흥학의 직무에 더 충실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백성들이 입장에서 본다면 교육을 통한 백년대계란 사실 한가한 얘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서원을 세우ㅓ 학문을 발전시키는 군수보다는 당장 세금 한푼이라도 깍아주는 군수가 더 휼륭한 목민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풍기에 그 흔한 선정비 하나 세워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퇴계는 풍기 군수로 교육과 흥학을 통해 하루가 아닌 일년의 계획을 세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했다.

 

5.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짓다.

 

이산서원은 1554년(명종 9) 안상(安?)이 영주 군수로 부임하여 군의 동쪽 번고개에 터를 잡고 세운 서원이다. 전응벽(全應璧)·빈수검(賓守檢)·안팽수(安彭壽) 등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1558년 7월에 시작하여 4개월 후에 마쳤는데 건물 규모는 33칸이었다.

1559년 서원을 건립한 후 퇴계는 원규(院規)와 기(記)을 짓고 건물의 명칭 등을 지었다. 강당을 경지당(敬止堂), 동재를 성정재(誠正齋), 서재를 진수재(進修齋), 정문을 지도문(志道門), 대를 관물대(觀物臺)라고 각각 이름하였다.

퇴계의영주지역건축물명명및편액일람

건축물명

이름 명명(命名)

편액및 詩, 기문

현존 유 무

이산서원(伊山書院)

각 齋를 명 명(命名)

기문 씀. 편액 씀.

재양정(載陽亭)

명 명(命名)

편액 씀.

망화정(望華亭)

명 명(命名)

편액 씀.

붕래정(朋來亭)

명 명(命名)

최락당(最樂堂)

명 명(命名)

편액 씀.

쌍청당(雙淸堂),

삼우대(三友臺)

경렴정(景濂亭)

詩, 편액 씀.

詩, 편액 있음

부석사(浮石寺)

금양정사(錦陽精舍)

기문 씀.

두릉서당(杜陵書堂)

편액 씀. 詩

영훈정(迎薰亭)

명 명(命名)

편액 씀.

편액 있음

광풍대(光風臺)

명 명(命名)

자민루

송재 이우(李?) 기문

퇴계는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에서 “고을 동쪽에 터를 잡았으니, 군치와 6 ~ 7리 거리로 번천고개가 우뚝 솟아 가리고, 그 안이 넓고 조용하여 아예 시가지의 티끌이나 인적과는 서로 접하지 않았다.”며 서원의 의미를 기렸다.

이산서원은 조선시대의 서원이 정립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서원이다. 퇴계는 서원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보이는 수학(受學)ㆍ거재(居齋) 규칙, 교수 실천요강, 독서법 등을 규정한 원규를 만들어 당시의 서원 운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가운데도 퇴계가 1559년 찬(撰)한 「伊山書院院規」는 우리나라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규를 살펴보면 1)『사서오경』을 근본으로 할 것? 2) 뜻이 바르지 못하고 행실이 좋지 않은 자는 의논하여 배척할 것? 3) 서재에 조용히 앉아 독서하며 다른 서재를 찾아가 잡담하지 말 것? 4) 가급적이면 자주 출입하지 말 것? 5) 사물잠(四物箴)·백록동규(白鹿洞規) 등 좋은 경계의 말을 걸어 놓을 것? 6) 책이 외부로? 여색이 안으로 출입하는 것을 삼갈 것? 7) 품관(品官) 가운데 사리를 알고 행의(行義)가 있는 자를 유사(有司)로 삼을 것? 8) 학생과 유사는 예의로 대할 것? 9) 서로 잘 구휼할 것? 10) 고을에 부임하는 자들은 항상 서원의 부흥에 힘쓸 것? 임시생도들은 재목이 된 후에 서원에 오르도록 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산서원은 처음에는 사당이 없이 강학을 위한 기구로만 설치되었는데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1572년(선조 5)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제사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1574년에 ‘이산(伊山)’이라고 사액되었다.

1572년 11월 1일 퇴계의 위패를 이산서원에 봉안(도산서원에는 1576년에 봉안)했는데 이해는 도산서원이 창건된 해이다. 이산서원은 옛 영천(榮川, 영주) 지방의 첫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이산서원은 퇴계의 서원 건립 정신이 면면히 녹아 있는 곳으로 도산서원과는 달리 퇴계 생존시 건립된 서원으로 퇴계의 교육철학이 모두 반영된 곳이었다. 퇴계가 지은 이산서원(伊山書院) 원규(院規)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산서원 원규((伊山書院院規)>

 

一제생들은 독서를 함에 있어서 사서오경을 근본으로 삼고 소학과 가례를 문호로 삼아야 한다. 나라에서 인재를 육성하는 뜻에 따르고, 성현의 절실한 가르침을 지켜, 온갖 선이 다 나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알고 옛도를 지금 시대에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모두 힘써 행하고 마음속으로 체득하여 실생활에 적용하는 학문을 하기를 힘쓰라. 그외 역사서와 제자백가서, 문장과 과거글 공부도 세상사에 두루 통하는 데 있어서 힘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나, 응당 내외, 본말과 경중, 완급의 차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늘 스스로 격려하여 나쁜 행실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그외에 허탄, 요상, 사탄, 음탕한 내용의 책들은 이 서원에 들여 가까이 접함으로써 도를 어지럽히고 뜻을 혼란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諸生讀書。以四書五經爲本原。小學,家禮爲門戶。遵

國家作養之方。守聖賢親切之訓。知萬善本具於我。信古道可踐於今。皆務爲?行心得明體適用之學。其諸史子集。文章科?之業。亦不可不爲之旁務博通。然當知內外本末輕重緩急之序。常自激?。莫令墜墮。自餘邪誕妖異淫僻之書。?不得入院近眼。以亂道惑志。]

一 제생은 입지(立志)를 견고히 하고, 바른 길을 향할 것이며, 공부는 목표를 원대히 하고 행동은 도의로 최선을 삼는다. 그 마음가짐이 비열하여 지식이 속루(俗累)에 벗어나지 못하고, 뜻과 희망이 오로지 이욕에 있는 자는 비학(非學)이다. 만일 성행이 괴상하여 예법을 비웃고 성현을 무시하며, 경(經)을 어기고 도리를 저버리며, 어버이를 욕되게 하고, 단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는 원중이 의논하여 내쫓는다.[諸生立志堅苦。趨向正直。業以遠大自期。行以道義爲歸者爲善學。其處心卑下。取舍眩惑。知識未脫於俗陋。意望專在於利欲者爲非學。如有性行乖常。非笑禮法。侮慢聖賢。詭經反道。醜言辱親。敗?不率者。院中共議?之。]

一 제생은 각기 서재에 조용히 있으면서 독서에 전심할 것이며, 의문되는 어려운 글을 강론함이 아니면, 다른 서재에 가서 잡담으로 시간을 허비하여, 피차 사색을 흐트러뜨리고 학업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된다.[諸生常宜靜處各齋。專精讀書。非因講究疑難。不宜浪過他齋。虛談度日。以致彼我荒思廢業。]

一아무런 일이 없거나 있더라도 고하지 하고 자주 드나들지 말 것이며, 의관이며 언어 동작에 한결같이 각각 성찰에 힘쓰고, 서로 충고하여 선을 권하라. [無故無告。切無頻數出入。凡衣冠作止言行之間。各務切?。相觀而善。]

一성균관 명륜당(明倫堂)에는 이천(伊川) 선생의 사물잠(四勿箴), 회암(晦菴:朱子) 선생의 백록동규(白鹿洞規), 진무경(陳茂卿)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걸었는데, 이는 뜻이 참으로 좋으니, 이 서원에도 이를 걸어서 서로 깨우치게 할 것이다. [泮宮明倫堂。書揭伊川先生四勿箴。晦菴先生白鹿洞規十訓。陳茂卿夙興夜寐箴。此意甚好。院中亦宜以此揭諸壁上。以相規警。]

一[書不得出門。色不得入門。酒不得釀。刑不得用。 書出易失。色入易汚。釀非學舍宜。刑非儒冠事

。刑謂諸生或有司以私怒?打外人之類。此最不可開端。若院屬人有罪。則不可全赦。小則有司。大則與上有司同議論罰

一서원의 유사는 근방에 거주하는 자로서 청렴하고 직무능력이 있는 품관 2인으로 임명한다. 또한 사리에 해박하고 행실이 반듯하여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선비 1인을 택하여 상유사로 삼는다. 임기는 2년으로 한다. [院有司。以近居廉幹品官二人差定。又擇儒士之識事理有行義?所推服者一人。爲上有司。皆二年相遞。]

一제생들과 유사는 서로 예절을 갖추어 접하며 공경과 신뢰로 대하여야 한다. [諸生與有司。務以禮貌相接。敬信相待。]

一유사며 모든 인원은 서원에 소속된 사람들을 잘 보살필 것이며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 서원일, 서재의 일이 아닌, 사사로이 개인적인 일을 시킬 수 없으며 사사로이 처벌 할수도 없다. [院屬人完恤。有司與諸生。常須愛護下人。院事齋事外。毋得人人私使喚。毋得私怒罰。]

一서원을 세워 선비를 기름은 국가의 우문흥학(右文興學)의 정책을 받들어 인재를 양성하는 뜻이니, 군수로 부임하는 이는 반드시 서원 일에 있어, 그 규모를 늘릴 지언정 줄이는 일은 없어야 할지라, 그리하면 어찌 사문(斯文)에 다행이 아니랴. [立院養士。所以奉

國家右文興學。作新人才之意。人誰不盡心。繼今?縣者。必於院事。有增其制。無損其約。其於斯文。豈不幸甚。]

一동몽(童蒙)은 글을 배우기 위해서나 부름을 받지 않고는 지도문(志道門)안에 들어서지 못한다. [童蒙。非因受業與招致。不得入入德門內。]

一서원에 머무는 유생은 어른 청소년을 가리지 않으며 인원의 한정도 없다. 일정한 자질을 갖추면 서원으로 올린다. [寓生。不拘冠未冠。無定額。成才乃升院。]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一/雜著

 

6.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과 교의(交義) 인물.

 

1)영주의 급문제현(及門諸賢)

퇴계학파의 인물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퇴계 문인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전통적인 교육의 형식으로서 스승과 제자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직접 급문(及門)하여 배움을 청한 것이 대표적인 형식이지만, 다만 서한으로 문목(問目)을 하였거나 사후에까지 정신적으로 의지하며 스승으로 모시는 사숙(私淑)의 형식도 있다. 이러한 사생(師生)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퇴계 문인록을 처음으로 작성한 사람은 권두경(權斗經, 1654-1726)이다. 그는 100여명의 문인록을 작성하여 『계문제자록(溪門諸子錄)』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퇴계의 6대손인 이수연(李守淵, 1693-1748)이 60여명을 추가하였고, 이를 이름하여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이라 하였다.

다시 이수항(李守恒, 1695-1768)이 10여명을 추가하고, 선생의 언행록과 문집 가운데서 선생의 가르침, 왕복 서신, 그리고 문인들의 만(挽), 제(祭), 소(疏) 등을 첨가하였다. 퇴계의 9대 손인 이야순(李野淳, 1755-1831)이 다시 수십 명을 추가함으로써 260여명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도산급문제현록』은 5권 2책 혹은 5권 4책으로 간행되었다.

『도산급문제현록』의 내용은 먼저 범례, 목록, 퇴계의 자명(自銘), 기대승(奇大升)의 후서(後敍), 조목(趙穆)의 언행총록(言行總錄)을 수록하였으며, 이어서 1권에서 5권까지 모두 309명의 문인에 대한 성명, 자, 호 본관, 거주지, 생몰년(生沒年), 퇴계와의 관계, 관력(官歷)을 기록하였다. 또한 퇴계와의 사제 관계를 나타내는 서(書), 시(詩), 만(挽), 제(祭), 록(錄)을 제시하였다.

퇴계학파 중에는 관료로서 진출한 인물들이 많은데, 대제학을 지낸 문인이 10명이고, 정승을 지낸 문인이 11명이며, 시호를 받은 문인은 37명이다.

『도산급문제현록』에 기록된 퇴계 문인 전체 309명(56개 지역) 중에서 관직을 받은 문인은 150명으로 48%를 차지하였다.

관직을 받은 퇴계 문인 150명 중에서 당상관인 3품 이상의 관직을 받은 문인은 71명으로 47%를 차지하였다.

퇴계 문인의 성씨별 문인수를 분석해 보면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영향력과 향촌사회의 학문적 기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산급문제현록』을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성씨는 역시 퇴계 가문인 진성 이씨 가문이다. 이는 퇴계의 자질(子姪)들이 문인록에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덕홍(李德弘) 가문인 영천 이씨, 권호문(權好文) 가문인 안동 권씨, 금난수(琴蘭秀) 가문인 봉화 금씨, 김사원(金士元) 가문인 안동 김씨, 김성일(金誠一) 가문인 의성 김씨 등의 순이다. 그러나 전체 성씨수가 120여 종류 이상이므로 퇴계 문하에는 성씨가 고루 분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 문인의 거주지역을 분석해보면 퇴계학의 지역적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도산급문제현록』을 분석한 결과, 퇴계 문인은 예안 56명, 안동, 49명, 영주 25명, 예천 10명으로 예안과 안동의 주변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배출되었다.

이들 지역에서 배출된 문인은 전체 문인 309명 중에서 127명으로 전체의 41%를 차지한다. 이는 지리적 여건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서울 지역에서 거주한 문인이 59명이나 되는데 이는 퇴계가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인물들이 퇴계 문하에 출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퇴계 문인의 거주지별 분석에 의하면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산청·함안·창원 등의 경남 지역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고, 소수이지만 강원·호남·호서 지방에까지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분포는 퇴계의 학문적 명성과 위상이 전국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산급문제현록』에는 사제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들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오른 퇴계의 제자 309명중 영주, 풍기지역 문인은 14(17)명(서울 59명, 예안 56명, 안동 49명)이다. 퇴계가 영주에서 초례를 치르고 난후 최초의 문인이 입문(入門)하였는데 그는 과재(果齋) 장수희(張壽禧)였다. 『급문록(及門錄)』에는 분명히 수학하였다고 적고 있다. 과재를 포함한 영주지역의 퇴계 문인들은 다음과 같다.

 

영주지역 퇴계문인(총 25명)

 

 

* 소수서원 『입원록』에 실린 22명의 유생들은 퇴계에게 직접 강학을 받은 유생들로서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누락되어 있지만 반듯이 포함해야한다. 이들을 포함한다면 영주지역의 퇴계 문인은 총 47명이 된다.

 

1.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264명 실림)에 실린 문인.(22명)

 

황준량(黃俊良); 선생에게 심경, 근사록, 주자서를 배움. 성주목사때 주자서절요을 간행. 선생보 다 먼저 죽자 선생이 제문과 만시, 그리고 행장을 지음.

박승임(朴承任); 공문심법, 사례변해, 성리요선 등을 저술, 선생의 만시, 주자서 질문.

박승륜(朴承倫); 박승임의 동생, 선생이 청백전가 4대자를 써줌, 선생의 예설을 모아 가례를 상서에 수록함.

장수희(張壽禧);선생이 영주 초곡에 장가들때16세의 어린나이로 수업 받음. 최락당의 편액 받 음. 이산서원 창건의 주역.

남몽오(南夢鰲); 도산에 터를 잡을때 선생을 따라감, 이때 선생이 계상시정거를 지어 보여줌. 박 승임이 영주부자라 하였다.

민응기(閔應祺); 시를 주었다.

민응록(閔應祿); 민응기의 아우.

김륵(金?); 영주에서 박소고, 황금계에게 배우다가 선생에게 나아가 수학함. 대사성때 정인홍의 ‘퇴계선생문묘출향’을 막음.

오운(吳澐); 영주에서 소고에게 배우고 숙부인 오수익을 따라 문하에 나아감. 언행록의 기와 시 가 있다.

이명홍(李命弘); 농암의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문하에 들어갔으나 일찍 죽음. 선생이 시를 써서 곡함.

이덕홍(李德弘); 어려서 금난수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5세에 선생의 문하에 들었다. 30세에 혼 천의와 선기옥형을 만들어 선생에게 올렸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유명으로 서적을 관리하게 하셨다. 선생 서거후 3년동안 심상의 예를 다했다. 계산기선록 (언행록), 시, 서, 만, 제문 이 있다.

이복홍(李福弘); 이명홍의 동생으로 동생 이덕홍과 함께 도산서당에 가서 수학함.

김택룡(金澤龍); 월천 조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5세에 선생에게 나아감.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후 꿈에서 선생을 뵙고 시를 지음.

김융(金隆); 18세에 선생 문하에 듬. 언행록에 선생과 태극도설에 관한 논의가 있으며 시, 서가 있다.

송복기(宋福基); 소고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급문. 선생이 극기명과 구방심제명을 쓰고 소식을 하여 주었다.

장근(張謹); 어릴때 입문. 제문과 연명이 있다.

문명개(文命凱); 제선생문이라는 글이 있다.

손흥경(孫興慶); 25세에 급문하였으나 얼마되지 못해 죽자 제자중에 가장 늦게 배움을 청한것 을 한탄하면서 3년을 심상했다. 선생은 심상 3년을 마치고 시를 쓰기도 했다.

박려(朴?); 선생의 손녀서. 문하에 출입하며 사랑을 받음.

배순(裵純);

곽한(郭瀚); 서가 있다.

황응규(黃應奎);이숙량과 함께 도곡에서 선생에게 수업 받음.

 

* 퇴계의 풍기 군수시절 직접 강학을 받은 22명의 소수서원 유생(1549년 소수서원 입원록에 오른 인물)들도 문인으로 보아야 한다.

* 권동보, 권동미 형제도 옛 순흥땅.

* 주요인물; 황기로(매학정 시를 지어줌), 주박(주신재의 아들), 허엽(초당, 허균의 부), 허균(홍길동전), 이요신(이순신의 형),

 

2. 『속 도산급문제현록(續 陶山及門諸賢錄)』(45명 실림)에 실린 문인.(3명)

 

허사렴(許士廉); 선생의 처남, 그의 공남정 시를 차운함.

황수량(黃遂良); 황준량의 동생. 서가 있다.

김몽득(金夢得 이해의 처남); 제문이 있다.

 

<영주군수>

●이정(李禎); 1541년(중종 36) 영주군수때 수업, 시, 서, 제문이 있다.

●허충길(許忠吉); 1572년(선조 5) 영주군수때 이산서원에 묘우를 건립하고 선생의 위 를 봉안하고 성학10도를 간행했다. 홍인우와 함께 ‘유금강’의 서 문을 받음.

 

2)교의(交義) 인물.

퇴계와 영주지역 인사들과의 교의는 연인접족(連姻接族) 이외에도 수학(修學), 사관(試官)으로 가서 만난 사람, 출임(出任)하여 관료로서 만난 사람, 시문(詩文)이나 서간(書簡)에 나타난 사람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금오(琴梧), 금의(琴椅): 죽창 금오와 해촌 금의는 자부의 백부와 중부로 사돈이다.(사 돈은 금재이다) 금의는 퇴계보다 앞서 풍기군수를 역임했으며 퇴계가 준 편지가 몇편 남아 있다.금오는 계상서당으로 퇴계를 방문하여 시를 짓기도 했다.

금축(琴軸):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고 상경길에 영주에서 만나 시를 읊기도 했다.

김난상(金鸞祥): 직간으로 이기에게 몰려 해남에 안치되었다. 1566년 단양으로 이배되 었는데 퇴계가 상경길에 단양에 묵을때 병산을 직접 방문하지는 못하 고 편지를 받은후 시를 보내 마음을 나누었다. 퇴게가 병산에게 준 시 는 3제목에 7수이고 서간은 8편이다. 병산은 퇴게의 조카 이교의 처 고모부이다.

민구서(閔龜瑞)

박대령(朴大齡): 사돈으로 퇴계가 단양에서 이임때 괴석 2개를 가지고 오다가 1개를 주 었다. 아들 박려는 퇴계의 손서이다.

박형(朴珩): 소고 박승임의 부친으로 여러 아들을 퇴계에게 수학시켰다. 퇴계는 박형의 죽음시 만사를 보내오고 부인 예안김씨의 묘갈명을 쓰기도 했다.

박민헌(朴民獻): 학문적으로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안공신(安公信)

안상(安?): 영주군수로 있을때 영주의 접과 의원을 통합하여 이산서원을 창건하였다. 퇴계에게 서원 창건에 대한 많은 자문을 받기도 했다.

황효공(黃孝恭): 역범도를 만들어 선생에게 질문하였고 발문을 받아 붙였다. 퇴계와 학 문으로 친했고 시문을 주고 받았다.

김윤석(金潤石): 김흠조의 아들로 함양군수로 있을때 퇴계가 지나가는 길에 들러 시를 함께 읊었다.

이면도(李勉道): 퇴계의 종중 사람으로 풍기에 살았는데 도산을 방문했을때 시 4수를 읊었다. 그는 퇴계가 풍기 군수시 죽계서원에 협력, 조력했다.

장응량(張應樑) ; 퇴계와 문과 동방급제자로 1544년 함경도로 부임할때 시로 송별했다.

초당 이석간(李碩幹): 충재 권벌의 매부이다. 초당은 퇴계와 교분이 두터워 자주 영주소 식을 전해주었으며 퇴계의 임종시 맥을 짙어보고 간호를 함.

대영당 김중문(金仲文): 소수서원의 초대원장으로 퇴게가 1550년 풍기를 떠나서도 5편 의 서찰을 보냈는데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서원에 유생들이 많이 모였는데 가서 가르치지 못하는데 대한 한탄과, 또 보희선 사의 시권을 부치는 일, 문성공 묘제 홀기를 개정해 보는 일, 주신재의 유소백산록에 관한 일, 서원에 왔다가 제생이 돌아간 일들을 그에게 낫낫이 물었다.

 

글을 맺으며

 

이상으로 퇴계의 영주에서발자취와의 인연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그동안 퇴계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 성과물들이 숱하게 나왔지만 퇴계의 처가인 영주에서의 퇴계에 대한 연구 성과물들은 나오지 않았다.

권오봉 박사의 『이퇴계(李退溪)의 실행유학』에서 소략하게나마 퇴계와 영주와의 관계를 다루었는데 권오봉 박사는 이글에서 “선생(퇴계)은 영주에서 시문(詩文)과 생활력(生活力)의 기록을 많이 남겼으며 영주 인물들과의 설화(說話)는 다른 어느 지방에서 보다 풍부하다”고 하였다. 영주는 퇴계가 학문의 기초를 이룬곳이고 또한 소수서원과 이산서원을 통한 서원교육을 실천하던 교육의 장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부족과 능력의 부족으로 퇴계의 영주에서의 활동을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내지 못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당시 영주 사람들과의 서간(書簡)과 시문(詩文)교류, 영주 관련 시(詩)의 분석 등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이글이 앞으로 영주에서의 퇴계의 행적과 사상을 연구하는 단초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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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삶을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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