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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99%의 세상은 오지 않는다

지와이원 2013. 7. 1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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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의 세상은 오지 않는다

 

 

    근대문명이 인권을 말하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말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차별과 불평등을 먹고 산다.

    그 불평등의 막장이 1대 99의 사회다.

    1%는 세상의 부를 독식하고 싹쓸이 한다.

‘   부자 몸조심’이라는 염치조차 없다.

    원망과 적대를 자초하는 이들의 탐욕은 차라리 위태롭게 보인다.

    이들에게 사회적 진화의 희망은 없다.

    그러면 99%에는 희망이 있을까?

     99%에는

    사회적 정의를 기대할 수 있고 도덕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99%의 불만을 결집하고 99%의 힘을 조직하면,

    부패와 탐욕의 1%가 사라지고

‘   더불어 사는 세상’ ‘99%의 세상’이 올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99%에도 희망은 없다.

    1%와 99%의 질적 차별성은 없다.

    탐욕을 현실화시키고 있느냐,

    아니면 1%에 진입하지 못해서 탐욕을 잠재화하고 있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그러니까 탐욕의 1%에도 희망이 없고

    잠재적 탐욕의 99%애도 희망이 없다.

    1%도 미래를 담지할 지혜가 없고

    99%에도 그런 지해가 없다.

    1대99의 사회,

    그 다음을 향해서 역사의 강을 건너는 문제를 놓고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할 것이 있다.

    역사적 전환에서,

    사회적 진화에서도 주인공이 되는 것은 1%다.

    99%에 의해서 세상은 진화하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라고 하든 문명사적 진화라고 하든

    햐향 평준화의 모델은 없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가령 불가에서 ‘성불하십시오’라고 말하지

‘   중생이 되십시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개별 존재자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완성도를 떨어뜨려서 범벅으로 만드는데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생물종의 진화에서 그렇다.

    진화에 성공하는 것은 1%이지 99%가 아니다.

    물론 종에 따라서 그 확률은 10%가 되는 것도 있고

    그 보다 훨씬 낮은 것도 있을 것이지만.

 


    또 하나의 예를 보자.

    덴마크의 소셜미디어 전문가인 제이콥 닐슨이라는 사람이,

    90대9대1의 법칙을 말하고 있다.

    인터넷시스템에서 콘텐츠를 창출하는 것은 1%이며

    그걸 퍼 나르고 댓글 다는,

    소위 팔로우(follower)라고 할 수 있는 층이 9%이고

    나머지 90%는 관망층 내지 방관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구도를 진화론에 적용하면,

    도태하는 게 90%이고,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선택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이 9%,

    그리고 변화를 미리 알고 대처해서

    어떤 시절에도 살아남는 게 1%라는 것이다.

    요컨대 스스로 생존에 필요한 환경을 할 수 있는 것은

    창조적 1%라는 것이다.

    이게 참 엄정한 이야기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결국 새로운 1%가 문제라는 것이다.

    다음 문명으로 역사의 강을 건널 수 있는 1%,

    탐욕의 1%가 아니라 탐진치 삼독의 무명을 벗은 1%,

    사회 역사적 정의성을 가진 1%,

    종의 진화에 성공할 수 있는 1%,

    가히 새로운 인간종자라고 할 수 있는

    1%의 등장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1%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지금은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지 않기에

    추상적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는데,

    새로운 생산성과 사회성을 담지할 수 있는,

    그리고 인격적 구성력을 가진 1%라고 할 수 있다.

    좀 풀어서 말하면,

    새로운 생산성이란 것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약탈적 생산성이 아니라

    친환경적이고 동시에 친인간적 생산성,

    바꾸어 말하면 미래적인 생산성이다.

    이것이 사회적 진화의 기초조건이다.

    그리고 사회성이란 것은,

    새로운 생산성을 공간(槓杆)으로

    지배와 통치의 조직이나 권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크라우드 소싱(crowd-sourcing)의 소셜네트워크

    내지 협력체계를 구성할 수 있는 동력이다.

    보다 정확한 의미에서는 체계(socio -connectome)를

    구성할 수 있는 본위력(本位力)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새로운 사회의 구성력이다.

    인격적 구성력이란 것은,

    1%와 99%를

    차등적으로 수직적으로 주종관계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체계에서 등가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결합력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1%는 영웅적 1%가 아니다.

    지배와 통치의 1%가 아니다.

    물론 시작은 선구적인 1%에 의한 것이지만

    체계의 구축과정에서

    등가성을 갖는 존재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사회가 꾸려진다.

    우리는 그런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문명사적 전환과 진화라는 게

    참으로 복잡한 문제 같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의 장이란 게

    넘어갈 때는 책장 넘어가듯이 쉽게 넘어간다.

    하나의 문화중력장이 무너지고

    다음으로 넘어갈 때는 쉽게 넘어간다.

    문제는 어떻든 1%다.

    숨어있는 1%다.

    새로운 1%이다.

 

        배영순(영남대 국사과교수/


        

 


 

 

 

출처 : 향기좋은우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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