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댄스

[스크랩]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1976

지와이원 2013. 8. 14. 12:09

 

 

제목 :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 : 조용필

제조회사 : 76,서라벌)

 

1.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 가는 연락선 마다
목 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 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2.
가고파 목이 메여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메이던
긴 긴 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디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 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안치행 편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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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趙容弼 / Cho, Yong Pil ..... 남성솔로 (기타, 베이스 기타, 보컬)  

출생
1950년 03월 21일 / 경기도, 대한민국
데뷰 (Debut)
1979년 (1집 앨범 '창밖의 여자')
별명 (Nickname)
작은거인
취미
기타연주, 골프, 음악감상
학력
-경기도 화성 송산초등학교 졸업
-서울 경동중학교 졸업
-서울 경동고등학교 졸업
가족
3남 4녀 중 여섯째이자 막내아들
신체조건
166cm, 56kg
프로필
- 결혼 : 1994년 안진현과 결혼
- 선호음식 : 생선찌개
- 경력사항
    1968 그룹 애트킨스 멤버로 문산 용주골 미8군 클럽에서 연주
    1969 그룹 <파이브 핑거스> 기타리스트로 음악활동 시작
    1969.02 그룹 <애트킨즈> 조직, 미 8군무대에서 활동
    1971.05 <김트리오> 결성
    1972 가수 데뷔
    1975 <조용필과 그림자> 결성
    1977.02 대마초 흡연으로 활동중단
    1978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결성
    1979 해금, <창밖의 여자>로 활동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


(황선우 작사-곡/조용필 노래)
75년 세밑에 내려진 가요규제 조치는 이른바 대마초 파동을 부르면
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대마초 사범의 주요 과녁은 70년대 전반
부를 지배한 뉴웨이브 기수들이었다. 이 불행한 명단에는 신중현, 김
추자, 김정호, 이장희, 김세환, 하남석, 어니언스의 임창재, 정훈희,
이수미 같은 당대 기라성 같은 대중음악가 20명이 포함되어 있다.
도도한 기세로 진군하던 통기타와 록밴드의 백가쟁명은 일거에 울
림을 멈췄다. 그리고 기다렸다는듯 구체제, 곧 트로트와 스탠더드팝으
로 복고가 진행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 수순이라 할 것이다. 송대관은
[해뜰 날]로 오랜 무명의 설움을 씻었고, 밴드 보컬리스트 출신 최헌
(오동잎), 김훈(나를 두고 아리랑]), 조경수(아니야)는 순응적 솔로
전향으로 성공의 축배를 마셨다.
야간업소 밴드 그림자 리더였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같은 팝트로트 태풍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이 노래는 한국 대중음
악사의 가왕 조용필에게 있어 [어정쩡한] 출세작이다. 음반사 요구대
로 헐값에 취입한 [돌아와요.]는 그의 음악적 출발점이자 지향점인
로큰롤-리듬앤블루스와 한참 거리 먼 노래였다. 현대적 트로트 선율
구조와 핵심을 상실한 리듬 패턴으로 이뤄진 텍스트는 바로 좌표를 잃
어버린 4공화국 후반기의 매너리즘을 그대로 반영한다.


[돌아와요.]가 선풍적 인기를 얻은 감정적 배경 한켠에 76년 봄
재일동포 모국 성묘단 귀향이 자극한 [누선 공감]이 숨어 있는 것은
부인할수 없다. 하지만 이 음반이 판매량에서 64년 이미자의 [동백 아
가씨] 이후 한국 음반산업의 획기적 분기점(당시 언론 추산 50만개,
음반사 집계 1백만장)을 기록하게 만든 결정적 원동력은 다운타운 음
악다방과 나이트클럽, 그리고 대학가 학사주점을 한 줄로 엮었던, 현
실과 미래에 대한 전망의 상실감이다.

[돌아와요.]는 조용필 개인에게 영욕을 동시에 안겨줬다. 순식간
에 획득한 스타덤은 이듬해 대마초 알레르기가 있는 그에게조차 [대마
초 가수] 사슬을 씌운 단초가 됐다. 그리고 조용필은 궁정동에 총성이
울릴 때까지 3년동안 활동금지 족쇄를 찬 채 인기의 대가를 치러야 했
다. 하지만 그 뒤 가요사가 말하듯 유신정권은 그로부터 노래할 권리
를 잠시 빼앗았을 뿐, 음악을 향해 이글거리는 열망까지 빼앗지는 못
했던 것이다.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사랑과 낭만 그리고 추억을 찾아서-韓五錫
글쓴이 : 한오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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