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례역사

[스크랩] ▶대마도 여행--(망국의 슬픈 한)

지와이원 2013. 8. 2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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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 -3- (망국의 슬픈 한)
 

 

    이즈하라 (嚴原) 시에는 가네이 조 (金石城跡) 라는

    대마도 영주 소(宗) 씨 가문의 거처유적이 있다.

    대마도 영주였던 소(宗)씨 가문은

    12 C에 북큐슈에서 와서 대마도를 정복했다는데

    우리 학자들의 견해로는 동래 宋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절대 아니라는

    일본인들의 주장이 어딘가 적혀 있다는데....

    여기 금석성은 1528년 내란으로 소씨 가문의 성이 소실되자

    14대 영주가 이곳으로 이전해 와서

    1669년 21대 영주인 요시자네가 개축했다고 한다.

    지금은 벽과 연못만이 남아있고

    사진처럼 아름다운 중앙문이 1991년에 다시 지어졌다.

 

 

 

    그네들 소씨가문이 살았던 터가 중요한건 아니고

    여기에는 비운의 조선 옹주였던 덕혜옹주의 자취가 남아있다.

    그녀가 여기서 산것은 아니지만

    (동경서 살았다)

 

    덕혜옹주와 대마도 영주인 소씨 집안의 37대 당주

    소 다케유키 (宗武志)와의 강제결혼의

    슬픈 역사가 어려 있기 때문이다.

    잠깐 그 역사를 더듬어 본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8일

    환갑이 넘은 고종과 귀인 양씨사이에 태어났다.

    망국의 한이 어린 슬픈 군주

    외로운 군주의 늙그막 딸 얼마나 귀여워 했을까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으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 보내지니

    불안하고 외로운 나날에 급우들의 악성 이지메까지 겹쳐

    그녀는 그만 조발성 치매라는 정신병에 걸리게 된다.

    1931년 5월 소 다케유키와의 강제결혼후

    정신병은 조금 나아지는듯 했으나

    딸 마사에 (正惠)를 낳은후 우울증과 겹쳐 병세는 악화되고

    결국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딸 마사에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이지메를 당하니

    자기가 조선인임을 부정하고 엄마를 증오하게 된다.

    그녀도 일본인과 결혼 2년후 자살했다고 한다.

 

    소 다케유키는 동경대학 영문과를 나온 백작으로

    시인, 화가, 수필가, 영문학자, 교수로 일생을 마친 인텔리이다.

 

                     (**이상 덕혜옹주 사진 퍼옴)

 

    그가 아내인 덕혜옹주를 방에 가두고 학대를 했다고 하나

    정신병을 가진 아내를 가졌다면 어떤 문제가 있었을지는 알수가 없고

    그가 나중 쓴 수필집에서 

    1931년 결혼때부터 1955년 이혼때까지의 25년은

    인생의 공백기였다고 아내와 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묻지 말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중 그가 쓴 시에는

    딸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적고도 있다.

    그는 1970년대 어느날 1961년에 환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방자 여사와 살고 있는 덕혜옹주를 찾아왔으나

    문앞에서 거절 당하고 귀국을 한다.

    그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하니

    그도 나쁜 인간으로만 치부되기엔

    억울한 면이 있을것도 같다.

 

 

    슬픈 역사를 되새겨주는 듯,

    기념비에는 두 사람이 1931년 결혼후

    11월 대마도를 방문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그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이 비를 세웠다고 쓰여있다.

 

 

 

 

    이즈하라 시내에서 도보로 가는 거리에 슈젠지 (修善寺)라는 절이 있다.

    백제시대의 법묘스님이 창건한 절이라는데

    이 절은 조선후기의 학자며 충신이며 의병운동가였던 면암 최 익현 선생이

    이곳 대마도 에서 순절하자

    장례식을 치른곳이며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최익현 선생이 누구신가?

    고종때 호조참판을 지낸 관리며 학자였지만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위정척사운동도 벌이고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도 올리고

    급기야는 74세의 고령이 되는 1906년에 의병을 일으킨다.

    그러나 일본군 아닌 관군과 싸울수는 없다하여 자진 해산하고

    붙잡혀서 대마도로 감금을 가게 된다.

 

    그는 일본땅을 절대로 밟지 않겠다고

    신발창에 고국의 흙을 집어넣어 갔으며

    일본이 주는 음식을 거절하여 결국 1907.1.1일 순국하게 된다.

    그를 추모하는 행렬때문에

    부산에서 그의 청양본가까지 15일이 걸렸다고 한다.

    맨날 말로만 국민을 외치는 사이비 애국자들이 넘치는 이 시대에

    최익현 선생의 기개에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대학시절 그의 손자인 최창규 선생이 강의를 하셨었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시고 계신지 모르겠다.

    하도 돌아온 올드맨들이 많은 시절인데 독립기념관장을 하셨던

    최 창규 선생은 컴백을 안 하시나?

 

 

    에이프런을 두른 보살은 어린 시절 죽은 아이들을 위무하기 위한것이라 한다.

 

 

 

 

 

 

 

 



 

 

 

출처 : 향기좋은우리카페
글쓴이 : 地坪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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