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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
부인 변중석 여사,
단골 요정의 마담, 고향의 첫사랑 여인과 운명적 관계
고(故)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부인인 고(故) 변중석 여사, ●단골로 드나든 요정 마담,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던 첫사랑의 여인인 고향 통천의 이장 집 딸이 그 주인공이다. 이 세 여인만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고 한평생 맴돌았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고 변중석 여사를 ‘살아 있는 천사’라고 묘사했다.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로 날마다 본사 직원 3백여 명의 점심을 준비했다. 더욱이 자식 양육까지 도맡았다. 어떤 경우에도 화내거나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변여사는 정주영 회장을 여보나 당신 대신 항상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자신보다 열 배는 부지런한 분이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잘 키우라”라고 했을 때도 아무 싫은 내색 없이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미모의 마담, 큰돈 빌려주고 자살 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타났다. 여름에 불어난 물과 부족한 장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모든 돈을 쏟아부었지만 사채 조달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요정 마담을 만나 자금을 부탁했다.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회장에게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제일가는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에 여전(현재의 대학)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요정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잘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가 돈을 보내줄 때마다 오인보 당시 경리 책임자가 서울에 가서 받아오곤 했다.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평소보다 세 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다. 내용이었다. 그 후 정회장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정 마담은 계속해서 큰 빚을 내 자금을 댔던 것이다. 오인보와 함께 울었다. 일부 이자를 갚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 생각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다’라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게 했다.
정회장의 첫사랑은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나뭇잎 같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몸에 진이 다 빠진 후에도 이장 집에 가 동아일보를 받아 올 생각만 하면 20리 떨어진 길도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허숭’처럼 경성에 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에게도 농군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신문을 주는 손만 봐도 천사의 손보다 더 곱다고 생각했다.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꿈을 이루겠다고 네 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광복 이후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 꽤 큰돈을 벌었다. 정회장은 여전히 그녀가 너무나 예뻐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그 후 오랜 세월 첫사랑은 정회장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67년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주영은 84세의 한국 최대 재벌이 되었다. 두 번째는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지시했다. 매일 아침 손잡고 걸어서 출근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이익치 회장에게 지시했다. 전 화신산업 박흥식 사장의 집을 70억원에 매입했다.
북한까지 가서 찾은 첫사랑 ‘이장 집 딸’
2000년 초 자식들의 재산 싸움을 보면서 정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선언했지만 자식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어졌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정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첫사랑 여인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통천 이장 집 딸을 수개월간 찾았다.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통천을 떠난 그녀가 청진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 그 가족을 평양에 데려다 놓았으니 원하면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전달했다. 정회장은 북한의 아태평화위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한 시간여 동안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2년 전에만 알았다면 아산병원에 데려가서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좀 늦었다”라며 아쉬워했다. 2001년 3월 눈을 감았다. 결국 그를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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