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열정

[스크랩] ▶미스코리아, 여기 물 한잔!

지와이원 2014. 1. 2.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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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여기 물 한잔!

 

 

"어르신, 건너가서 타세요.

여기서 타면 돌아가서 요금이 많이 나와요."

63빌딩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영등포 등기소로 가자니까

택시 기사가 친절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조금 도는 건 맞는다.

하지만 요금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

바로 앞에서 유턴할 수도 있다.

내키지 않는 코스라서 그러는 거 다 안다.

그래도 입 다물었다.

 

나더러 '어르신'이라고 불러주는데,

모처럼 어르신 노릇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귀찮지만 길을 건너가 택시를 탔다.

입 벙긋은 고사하고 친절한 안내에 고맙다는 듯

눈인사까지 건네면서.

내게 '어르신'은

나보다 훨씬 나이 많고

존경스러운 분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방송사에서

프로그램 만드느라 유서 깊은 마을을 찾아다닐 때다.

안내하는 분이

나이 지긋하고 점잖은 할아버지께 엎드려 절하며

그리 높여 부르는 걸 보고 배웠다.

나 역시

'어르신!' 하며 머리 조아리고는

마을의 역사나 전통과 민요에 대하여 여쭙곤 했다.

도움 주는 분인데

말 대접은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지 않은가.

자꾸 하다 보니 입에 붙고 몸에 배었다.

그렇게 불러드리니 말 붙이기도 쉬웠다.



기를

높여 불러 주는 걸 싫어하는 사람 있을까.

치켜세워주는 말 한마디에

나 또한 속없이 우쭐거리기도 했다.

호칭은

상대방 기분을 좌우하고 마음을 움직인다.

 

재치 있게 불러서

남을 즐겁게 해주면 대접도 잘 받는다.

방송인이며 프로 레슬러인 김남훈씨에게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요,

식당에 가면 여종업원에게 '미스코리아'라고 불러요.

'미스코리아, 여기 물 한잔!' 하면,

서비스가 확 달라지죠."

종업원 중에 더러는

'미스코리아'라는 한마디 말에 몇 시간은 붕 떠 있었을 게다.

빈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슬쩍 거울 보면서

"내 숨은 매력이 뭘까?" 하고 살피진 않았을까.

예쁜 표정 지으며

우아하게 서비스했을지도 모르겠다.

호칭에는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가 담긴다.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나 자세도 드러난다.

소중한 사람에게는

아끼는 말을 골라 쓰기 마련이다.

 

작고한 방희덕 교수는

라디오 진행자로 한동안 활동했다.

그는 방송에서

'당신'이란 말을 즐겨 썼다.

청취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당신'이라고 불러주곤 했다.

깊은 밤 라디오에서

'당신' 하던 나직한 울림이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있다.

함께 일하던 PD도

기분 좋으면 '당신'이라고 불렀다.

좋은 호칭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무슨 호칭이 기분 나쁘냐고 물었더니

한 택시 기사는 '당신'이란다.

속 뒤집힌 기억이 있었나 보다.

 

누군가가 턱 쳐들고 그리 말했나 보다.

어떤 손님이 삿대질하며 '당신' 했나 보다.

'당신'이란 말은 맞서 싸울 때는

상대방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된다.

말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말에 담긴 감정이다.

아무리 좋은 호칭도

마음 없이 부르면 아무것도 아니다.

'너'라는 호칭도 그렇다.

사이좋을 때는 친근감 주지만,

사이가 틀어지면 거리감 생기게 한다.

 

부부 싸움에서는 비수가 된다.

여섯 살 연상 여인이

연하 남편에게 울먹이며 하는 말을 들었다.

"아이 앞에서만은 '너'라고 하지 마.

제발!"

[ESSAY] 미스코리아, 여기 물 한잔!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지난 11월 말,

교육부가 초등학교 4학년에서 고등학교 2학년까지

학생 454만명을 대상으로 한 2013년 2차

학교 폭력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통적 학교 폭력은 줄어들고,

언어폭력과 사이버 폭력이 늘어난 걸로 나왔다.

말이 거칠어졌다.

보고 배워야 할 정치인의 말도 예외는 아니다.

막말도 그렇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호칭도 그렇다.

날 세워가며 맞서고 팍팍하게 군다.

기분 좋게 띄워주고 할 말 하면 안 될까.

반어법도 있지 않은가.

호칭에서라도 말 인심 쓸 수는 없을까.

동네 아파트 앞길에 노점상이 늘어섰다.

그 길로 지나다가,

낭랑한 목소리에 멈춰 섰다.

"아유, 한동안 안 보이더니, 예뻐지셨네.

갈수록 예뻐져."

 

누가 얼마나 예쁘기에 저리 인사할까.

본능적으로 고개 돌렸다.

늙수그레한 할머니가 기운 없이 앉아 있었다.

고개도 못 쳐들고 그냥 듣고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가

길가에서 생선 놓고 파는 할머니에게 건넨 덕담이었다.

할머니의 핏기 없는 볼에

불그스레한 빛깔이 언뜻 비쳤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이다.

관계의 의미를 헤아려 본다.

이름을 불러 주니까 꽃이 되었단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계절이다.

내 주위가 온통 꽃밭이면 얼마나 좋을까.


 

 
출처 : 향기좋은우리카페
글쓴이 : 地坪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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