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열정

김봉진 1976

지와이원 2020. 12. 29. 23:21

1976년 10월 10일 출생한 김봉진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처음 접하고

그와 같이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을 꿈꿨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공업고등학교에 가게 된다.
못다한 화가의 꿈을 뒤로하고 수도공고에 진학한 그는 학업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42명의 반 학생 중 40등을 하는 수준(41등과 42등은 운동부 학생들이었다고)에 머물렀다.

그림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에게 공고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보다못한 부모님이 미술학원에 다니게 해 줬고

김봉진은 순수 예술 말고도 디자인을 전공하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된다.
뒤늦은 준비로 서울예술대학교(구 서울예전)에 진학,

실내디자인을 전공하게 된 김봉진은 졸업 후 웹 디자인 등 디자이너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는 주로 광고, IT 분야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넉넉하지 않은 월급으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디자인 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그는 직장 생활 7~8년 정도가 지났을 2008년 첫 창업에 도전한다.

전세금까지 빼서 2억원을 마련 강남에 수제 가구점을 차렸던 것.
남다른 디자인 실력에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방문객들은 예쁜 디자인의 가구들을 구경하고

사진만 찍을 뿐 실제 구매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높은 단가와 낮은 사업성이 문제였다. 단지 예쁜 디자인만으로는 사업에 성공할 수 없으며,

고객과 소통하는 가운데 고객의 니즈를 파악해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수익을 창출하고 생존하는 사업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됐다.
첫 창업 실패로 큰 빚을 진 그는 돈을 갚기 위해 다시 현실 직장인으로 돌아왔다.

수제 가구 사업 폐업 후 그는 낮에는 NHN(현 네이버)에서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밤에는 다른 디자인 시안 일감을 따와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빚을 갚아 나갔다.

훗날 몇몇 강연에서 그는 당시 5살이던 첫 딸,

그리고 아내와 함께 겪어내야 했던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 회고한 바 있다.
와중에도 김봉진은 창업에 대한 못다 이룬 희망의 끈을 놓치 않고 있었다.

 

그리고 2010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아이폰으로 촉발된 스마트폰 모바일 혁명이 세상을 뒤바꿔 놓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김봉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다
2008년 미국에서 첫선을 보인 후 2009년 국내에 들어온 아이폰 출시로

스마트폰 보급이 확산되며 다양한 초기 (어플리케이션)이 나타나고 있었다.
김봉진은 '거리를 어지럽히고 집집마다 대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음식점 전단지를 모바일로 옮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부모님이 오래도록 고깃집, 횟집 등

요식업에 종사해 온 것도 다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진지하게 사업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게 있으면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생각에서 시작한 토이 프로젝트와 같았다.

개발자였던 친형을 포함해 전직장 동료, 학창시절 친구 등을 모아

5~6명이 답십리 카페베네를 작업실 삼아 주말마다 모여 프로젝트를 진척시켰다.
이미 첫 사업 실패와 이어지는 생활고로 자본금조차 없었기에 무자본 창업이었고

사업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법인을 세워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공동창업자 대부분은 본 직장을 갖고 낮에는 회사 일에 전념하고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

각자 일하다가 주말에 커피숍에서 만나는 식으로 배달의민족을 세상에 내 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봉진이 주목한 분야는 114와 같은 전화번호 서비스였다.

스마트폰용 전화번호부 앱을 만들고자 했으나 수익성과 확장성,

DB 구축에 어려움을 느끼고 전화번호를 제공하는 다른 형태의 앱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다른 곳은 배달음식점 전화번호, 즉 전단지(찌라시)였다.

그렇게 그는 배달의민족의 초창기 버전에 해당하는 전단지 앱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2010년 6월 25배달의 민족이 출시되기 조금 전 이미 배달통(2010년 4월 출시),

배달114 등의 경쟁자들이 먼저 나와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배달의민족은 출시 직후 주요 앱 마켓, 스토어에서 1위에 오르며 단숨에 최고 자리에 등극했다.
음식점 정보가 많을수록 앱 경쟁력이 커지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전단지를 모아

일일이 스캔하고 앱에 반영하는 맨땅에 헤딩하듯 노력을 기울였다.

김봉진 대표가 직접 발로 뛰며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 아저씨에게 부탁해 버려진 전단지

무더기로 받아오기도 하고, 심지어 휴지통을 뒤지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먼발치에서 땅에 떨어진 전단지만 봐도

어떤 메뉴의 어느 음식점인지 알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배민의 존재감과 향후 성장 가능성을 알아본 투자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김봉진 대표의 남다른 발품을 파는 성실함과 실행력을 알아본

본엔젤스로부터 1억원의 초기 투자를 받게 된다.

투자를 받으려면 개인사업자가 아닌 법인 설립이 필요했기 때문에

비로소 2011년 3월 (주)우아한형제들을 만들었다.

경영자로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서비스 초기 배민은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특히 출시 초기에는 이용자가 앱으로 음식을 주문하면 직원들이

일일이 해당 가게로 다시 대리로 전화를 걸어 실제 주문을 넣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경쟁 앱(요기요)에서 전화통화 없이도

실제 앱 화면 터치만으로 주문까지 가능한 기능을 내 놓으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 기능은 배민도 준비 중이었으나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는 않았던 것인데,

경쟁앱의 새로운 기능에 이용자가 이탈할 것을 염려한 김봉진 대표는 임시방편으로

앱 상에서는 일단 이용자가 화면 터치로 주문을 끝내는 것처럼 보이게 해 놓고

실제로는 여전히 배민 직원들이 음식점에 전화해 주문을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2-3개월을 대응했다고 훗날 재미있는 초창기 에피소드로 실토한 바 있다.

배달의 민족이 세상에 나온 지 채 2년 정도가 된 2012년부터

국내 배달앱 시장은 초기 형성기의 첫번째 각축전이 벌어지게 된다.

배달의민족이 2개월 먼저 출시된 배달통과 고객 점유율을 높여 나가기 위해 경쟁하고 있던 와중에

한국 시장의 잠재성을 본 독일계 딜리버리히어로가

요기요라는 이름으로 별도 앱을 띄우며 국내 시장에 진출해 들어왔다.

딜리버리히어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통을 인수해 버린다.

외형적으로 배민-요기요-배달통의 3파전이 형성됐지만 '토종' 배달앱 배민과

독일계의 '한 지붕 두 가족' 요기요-배달통 간의 2파전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배민은 초창기부터 키치하고 위트 넘치는 B급 감성의 마케팅으로 인기 몰이를 했다.

이후 사업의 확장을 위해 몇 차례 대규모 투자를 유치(2014년 말 골드만삭스로부터 400억 원,

2016년 상반기 중국계 힐하우스캐피탈로부터 560억 원 등)했다.

그렇게 확보한 투자금으로 대대적인 TV 광고를 벌이는 등 마케팅 전쟁을 펼친 결과

2010년대 중반 즈음에는 2위와 큰 격차를 벌리며 압도적인 시장 1위 점유율을 확보하게 된다.


'수수료 0%' 결단... 1위로 우뚝 서다
시장에서의 경쟁 관계와는 별도로 배민의 첫번째 위기 상황이 이 즈음 찾아온다.

소상공인 음식점 사장님들을 상대로 너무 높은 수수료를 받는다는 것.

당시에나 지금이나 주요 배달앱 중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의 비용을 책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민은 1위라는 이유로 가장 앞에서 비난을 받아야 했다.

똑같은 가게에 치킨을 시켰는데 전화 주문을 했을 때보다 배달앱을 통해 주문했을 때

양이 적게 오더라는 등의 괴담까지 언론 보도를 장식했다.
갈수록 거세지던 수수료 논란에 2015년 8월 김봉진 대표가 결단을 내렸다.

그 유명한 '수수료 0%' 선언.

당시 배민의 주 수익 모델은 건당 수수료를 받는 모델과

월 정액 광고비를 받는 모델로 가입 음식점이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당시 앱 내 결제(바로결제) 건당 수수료로 벌어들이는 매출은 회사 전체 매출의

30% 정도를 차지했는데, 수수료 전면 폐지로 이를 단번에 포기하겠다고 한 것.

이용자와 음식점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소상공인과의 상생이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수수료 논란이 지속되는 한 이용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더 크게 성장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한 김봉진 대표가 '멀리 내다보고' 통큰 결단을 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눈 앞의 이익, 단기적인 이익을 좇고자 했다면 수수료를

조금 낮추는 방법도 있는데 굳이 '전면 폐지'를 선택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

이 때문에 당시 이미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던 외국계 투자 자본은

김봉진 대표의 이런 아이디어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김봉진 대표가 투자자를 설득하기 위해 홍콩으로 직접 날아간 일화도 훗날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이 결단으로 우아한형제들은 당시 추진 중이던

대규모 추가 투자 유치가 코앞에서 무산되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봉진 대표의 선택은 틀지지 않은 것이었음이 머지 않아 수치로 나타났다.

사실 수수료 폐지 직후 6개월은 회사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나날이 이어졌다.

(당시 김봉진 대표의 학창시절 친구로 공동 창업 후 집안 살림을 맡아 왔던 박일한 경영지원부문

부사장은 직원들의 월급을 마련하기위해 대출을 알아보는 등 백방으로 뛰어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반년만에 상황은 반전됐다.

수수료 논란에서 상생의 결단을 한 배민으로 더 많은 고객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

2015년 495억 원이었던 회사의 연간 매출액은 이듬해 848억 원으로 71%나 증가했다.

입점 음식점도 계속해서 큰 폭으로 늘어났고, 주문수 역시 급증했다.

창업 이후 줄곧 적자였던 회사는 2016년 처음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2015년 우아한형제들은 배달의민족의 주요 매출원이던 건당 수수료를 자진 포기한 이후

차세대 먹거리로 배민라이더스와 배민프레시(이후 배민찬으로 리브랜딩)를 키워나갈 것임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배달대행 업체 '두바퀴콜'과 국내에서

신선식품 새벽배송 서비스를 처음으로 선보인 '덤앤더머스'를 인수했다.

이후 몇 년 간 배민라이더스는 기존에 자장면, 치킨, 피자, 족발/보쌈 일색이었던

배달음식점에서 확장해 버거, 회, 초밥, 베트남쌀국수, 파스타, 스테이크, 커피, 디저트까지 동네마다

줄서서 사먹는 맛집의 고급 음식들로 배달앱 서비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 나갔다.

밥, 빵, 반찬, 샐러드 등을 새벽배송하던 배민찬은 신생 업체의 등장과 대기업 진출 등

시장 경쟁이 격화하면서 서비스를 종료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후 우아한형제들은 음식점에 필요한 식자재 및 부자재를 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소상공인에게 제공하는 배민상회, 나아가 가정간편식(HMR)을 비롯해 생필품까지

오프라인 마트 등에서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한 상품을 주문 즉시

배송해 주는 '초소량번쩍배달' 서비스 B마트를 띄우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2019년 우아한형제들의 연간 매출액은 5000억 원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