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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문을 빛낸 조상님들

지와이원 2005. 4. 10. 16:44

김담 (金淡)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의 명신(名臣) 담(淡)은 로(輅)의 손자(孫子)로 역수(歷數)와 관상(觀象)에 밝아「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만들었으며 일영대(日影臺)와 천문지(天文誌)·전세(田稅)·구등(九等)에 관한 법을 모두 어명에 따라 선정(選定)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여섯 번이나 소(疏)를 오려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세종은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삼고 천담복(淺淡服 : 엷은 옥색의 제복)을 내리며 '집에 있을 때에는 상복을 입고 조정에 와서는담복을(淡服)을 입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1416(태종 16)∼1464(세조 10).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이며 현감 김효량(金孝良)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 천문학자로 세종 17년(1435) 정시(庭試)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이어 집현전 저작랑 · 박사를 거쳐 이조 정랑 · 제언 종사관(堤堰從事官) · 승문원 부교리(承文院副校理)를 거쳐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과 장령을 지내고 충주 목사, 안동 부사, 경주 부윤을 거쳐 이조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1436년 모상(母喪)을 당한 이순지(李純之)를 대신하여 간의대(簡儀臺)에서 천문(天文)을 관측한 이래 일반관직을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천문과 과학기술관계의 일에 깊이 관여하여 1439년의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과 《태양통궤(太陽通軌)》 《태음통궤(太陰通軌)》 편찬에 참여하였고, 1445년의 안산 양전(安山量田)과 제언공사(堤堰工事)에 계산을 담당하고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역법의 정비와 관계서적 편찬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구강서원(龜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김륵(金勒)

1540(중종 35)∼1616(광해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 아버지는 진사 사명(士明)인데, 백부인 형조원외랑 사문(士文)에게 입양되었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8년 검열·전적을 거쳐서 예조원외랑·정언이 되었다. 1580년 전적 겸 서학교수가 되고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다. 이듬해 부수찬·지평·직강 등이 되고, 1584년 영월군수로 갔을 때 노산군(魯山君:단종)의 묘를 배알하고 제청(祭廳)·재실(齋室)·찬청(饌廳)을 묘 옆에 짓고 처음으로 ‘노산군’이라는 호칭을 신주(神主)에 써서 부인 송씨(宋氏)의 신위와 함께 모셔 신임군수마다 죽던 변을 막았다.

3년 후에 돌아와 선조로부터 많은 치하를 받고, 교리에 서용되고, 1590년 집의·사간·검열·사인·사성·사복시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안동부사가 되었다가, 경상도 안집사(安集使)로 영남에 가서, 충성스럽고 의기있는 선비들에게 국가의 뜻을 알리고, 왜적을 토벌하도록 장려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이듬해 경상우도관찰사가 되어 전라좌·우도의 곡식을 운반하여 기근이 든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이어 도승지·대사간·한성부우윤·대사성을 거쳐, 1594년 동지의금부사·이조참판·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시무16조〉를 상소하였는데, 모두 치안에 좋은 대책이라는 평을 들었다. 1599년 명나라 장수를 접반하고 형조참판에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612년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남아 있는 것처럼 꾸며 일본의 재침략을 막아 달라는 청을 올려, 명나라로부터 일본에게 재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칙서를 보내게 하고 돌아왔다. 곧, 대사성이 되고 안동부사로 나아가 범람하는 낙동강의 재해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수축하여 후세에까지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고 또 앞서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 별묘(別廟)의 의물(儀物)을 종묘의 의물과 똑같게 하는 것에 반대한 것과 관련되어 강릉으로 유배가게 되었는데, 여러 대신들의 변호로 풀려났다. 영천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백암문집》이 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고, 시호는 민절(敏節)이다.

 

 <백암 선조의 친필>


김약련(金若鍊)

1730(영조 6)∼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유성(幼城), 호는 두암(斗庵) 또는 인수. 아버지는 생원 지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로 생원 태래(泰來)의 딸이다. 1774년 증광별시문과전시(增廣別試文科殿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1776년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함을 입어 삭녕(朔寧)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정월에 풀려났다. 그뒤 16년 동안 은거하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793년(정조 17)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고, 이어 전적·병조좌랑·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두암선생문집》 10권 5책이 있다.

 

김영(金詠)

1602(선조 35)∼1674(현종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자심(子尋), 호는 죽교(竹橋). 할아버지는 목사 현도(玄度)이며, 아버지는 예조정랑 정후(淨厚)이다. 1635년(인조 13)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올라 1651년(효종 2)에 사옹원참봉이 되고,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으로 옮겼다. 평소 정직한 발언과 높은 지기(志氣)로 인해 이경석(李景奭)과 김육(金堉) 등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높은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김옥(金옥)

1596(선조 29)∼1660(현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 자는 여정(汝精), 호는 고산(孤山). 영주출신. 늑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승사랑 수선(首善)이다.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군수에 이르렀다. 남달리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또한 마음이 맑고 욕심이 없어 행실이 바르다는 평판을 받았다.


김위(金위)

1709(숙종 35)∼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공준(公準)·호경(虎卿), 호는 갈수헌(渴睡軒). 아버지는 원열(元烈)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진사 창시(昌時)의 딸이다. 1750년(영조 26) 문과에 급제, 1756년 강화도장령전별검이 되었고, 1759년 성균관전적과 예조좌랑을 지낸 뒤 1763년 이조좌랑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1788년 80세에 승자,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이 되었다. 벼슬에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덕망과 인품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는 《갈수헌문집》 4권 2책이 있다.


김정후(金靜厚)

1576(선조 9)∼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사외(士畏), 호는 동리산인(東籬散人)·파옥진인(破屋陳人). 개성출신. 아버지는 현도(玄度)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 보령현감이 되었다. 그때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고로 역적에 몰려 죽게 되었는데, 이를 경축하는 감사의 전문(箋文)을 지으라는 부탁을 받고 그를 거절하자 노여움을 사 구금당하였으나 조금도 굽히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예안현감이 되었다가, 전적·직강(直講) 등 경직을 역임하고 다시 옹진군수로 나갔으나 고관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당했다. 그는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은 최립의 문인으로서 송도인(松都人)의 문사가 되었다.


김태일(金兌一)

1637(인조 15)∼1702(숙종 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추백(秋伯), 호는 노주(蘆洲). 아버지는 단이며, 뒤에 곤에게 입양되었다.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장령·헌납·문학·보덕을 차례로 역임하였고, 1694년 사간으로 있을 때 서인인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를 도모하자 이들을 탄핵하였다. 뒤에 왕이 민씨의 폐위를 후회하게 됨으로써 삭출(削黜)당하였다. 저서로는 《노주집》이 있다.

 

김택룡(金澤龍)

1547(명종 2)∼1627(인조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 자는 시보(施普), 호는 와운자(臥雲子). 아버지는 양진(楊震)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거쳐,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였다. 1595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 선조 앞에서 《주역 周易》을 강의하였다. 같은해 헌납·성균관직강을 거쳐 이듬해 지평·세자시강원 겸 사서를 역임하고, 전라도 광양·운봉에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공적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00년 전적을 거쳐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황의 문인 조목(趙穆)에게서 배웠는데 이황의 문하생들과도 교유하며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김해(金해)

1534(중종 29)∼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사회(士晦), 호는 운송(雲松). 아버지는 반천(半千)이다. 1560년(명종 15) 진사가 되고, 156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 형조좌랑, 1573년 지평을 거쳐 이듬해 장령이 되었으며, 1576년 사간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상주목사로 재임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당황한 나머지 순변사 이일(李鎰)을 맞이한다는 핑계로 성을 떠나 피신하였다. 그러나 뒤에 판관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개령(開寧)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상주성을 일시 탈환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왜적에게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인조 때는 참판을 가증(加贈)하고 향리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해일(金海一)

1640(인조 18)∼1691(숙종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 자는 종백(宗伯), 호는 단곡(檀谷). 아버지는 단이다. 1660년(현종 1) 진사시에 합격한 뒤 1663년 선교랑(宣敎郎)의 신분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로 지평·정언·헌납·집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숙종초년 집권세력의 한 사람으로서, 1675년에는 김수항(金壽恒)을 탄핵하여 유배시키고, 허목(許穆)과 윤휴의 대립에는 허목을 편들었다. 1678년 집의로 재직중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1689년에는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부사(副使)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축출되었다가, 1689년 기사환국 때 승지로 등용되었다. 목민관으로는 경주부윤까지 승진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행동이 의젓하였다


김현도(金玄度)

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 자는 홍지(弘之), 호는 인재(認齋). 아버지는 여정(汝鼎)이며,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1599년에 해주목사가 되었다. 이때 지평 남탁(南晫)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구황책(救荒策)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았다는 황해도어사 김치(金緻)의 상소로 파직당하였으나, 1602년 모두 모함이었음이 드러나 복직되고 양재찰방(良才察訪)을 지냈다.


김흠조(金欽祖)

생몰년 미상. 조선 중종 때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경숙(敬叔). 아버지는 효우(孝友)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급제, 검열 등을 지내고 1507년(중종 2) 예문관봉교로서 정충량(鄭忠樑)·이희증(李希曾) 등과 함께 상소하여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 등의 신원(伸寃)과 유자광(柳子光) 등의 처벌을 주청하였다. 1509년 언양현감으로 시폐칠조(時弊七條)를 개진하였고, 1521년 상주목사를 거쳐 1525년 제주목사가 되어 이진(移鎭)과 점마관(點馬官) 파견의 금지를 주청하였고, 이듬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 사림파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묘사화 이후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자료 출처: 디지털한국학 http://www.koreandb.net/Bon/HTML/bon_k36_76.htm

출처 : 선경회-재경 선성김씨 청장년모임
글쓴이 : 김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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