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소식

[스크랩] 60-70년대 추억의 생활소품들

지와이원 2006. 2. 11. 17:02





불조심 등잔. 종지에 심지를 늘이고 불안정하게 밝히던 것을 사기로 만든 등잔이 널리 보급되면서 안전하게 불을 밝힐 수 있었다. 등잔불 아래 늦도록 공부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콧구멍 주변이 그으름에 까맣게 되어 있었다. 이 때(50,60년대)에는 집집마다 마루 기둥에 석유병이 매달리고 귀한 석유를 사러 먼 거리를 다녀와야 했었다.








캔등잔과 유리병등잔. 약병에 볼트와 심지를 끼우고 철사로 몸을 감아 기둥에 걸으면 석유 타는 냄새와 할아버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병이나 CREME SODA 캔으로 만든 등잔으로 불을 밝히고 그을은 얼굴로 공부하였다.






도시락. 추억의 알루미늄 도시락으로 여기 저기 구겨지고 난로에 그슬려도 달그락거리며 우리의 정신을 깨워주다가 마침내 바닥은 하얗게 부식되어 자주 구멍이 났다.




 



저금통장. 1970년도 저금통장으로 5원,10원,100원 단위로 입금되어 있다.







이발기계. 할아버지께서 양손으로 잡고 빡빡으로 깎아주던 이 기계는 자주 머리칼을 뽑아 그리 성능이 좋지 않았고, 우리들의 머리는 늘 허옇게 기계충이 자리잡고 있었다.








놋화로. 안방이나 사랑채에 놓였던 보편적인 놋화로이다. 화로 몸체에 화형 고임대를 붙이고 세 개의 다리에는 태극 문양을 쪼았다.




 



가계부. 1961년도 가계부로 학용품 구입과 모심기, 보리타작 등의 일과를 적었다.

 











70년-80년대 초반 영화 포스터






절미통(節米桶). 1960, 70년대 보리고개를 넘던 시절의 생활소품.  하루 세 끼니를 걱정없이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부자였다. 이땅의 어머니들은 밥을 짓기 전에 쌀을 한 줌 이 통에 별도로 담아 마지막 쌀이 떨어졌을 때 비축했던 쌀로 우리들의 굶주림을 해결하였고 때로는 이 절미통의 쌀을 팔아 학비를 대었다.










꽃고무신과  검정고무신. 1960, 70년대 나들이 할 때 신던 엄마와 내 꽃신 그리고 검정 고무신이다. 명절이나 장날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닦아 신던 것인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

      월색

     달빛을 걸어오는 흰 고무신
     오냐 오냐 옥색 고무신
     님을 만나러 가지러
     아닙니다. 얘.
     낭군을 마중 가나?
     아닙니다. 얘.

              -박목월-







알집. 짚으로 엮어 조그맣게 입구를 내고 계란을 넣어 벽에 걸어 두었는데, 만든 이의 아름다운 심성이 느껴진다.

 






풍년초. 1960년대의 담배 풍년초이다. 할아버지 담배 쌈지와 곰방대, 그리고 방안 가득 풍겨나는 구수한 할아버지 냄새는 이 담배로부터 짙게 배어나왔다. 할아버지 담배 심부름도 이제는 아득히 추억 한켠으로 물러나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파리약 . 60, 70년대의 파리,모기 살충제 병으로 어느덧 추억의 약병이 되었다. 침침한 등불 아래 입으로 불어 뿜어대던 이러한 문명의 시절이 오히려 컴퓨터를 몰라도 인간적이었던 때였고, 어머니는 뒷산에서 독버섯을 따와 밥풀에 이겨 파리를 잡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 파리약을 칠 때마다 심한 석유 냄새가 났는데, 그것은 DDT에 향료와 석유를 섞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짚망태기. 온갖 씨앗들을 담아두거나, 논 밭에 나갈 때 걸머지던 짚으로 만든 일종의 가방이다. 지금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적부터 쓰던 서류 뭉치와 벌레들의 집으로 비바람 세월에 삭고있다

출처 : 영주초등 총동창회
글쓴이 : 68회 김대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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