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만해도 성씨있는 양반은 10%뿐이 안되었는데 조선중기 양반계급이 |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부터 평민들도 각 씨족 별로 구전 해오던 |
자료에 의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
토착민들은 지역별 연결에 따라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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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한 유랑민이거나 원래 천민은 |
성씨없이 돌쇠,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는데 |
조선후기에는 양반들의 도움으로 성 하나 만은 가지게 되었고. |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
다시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일제가 주었는데, |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 이, 박 등등"이었다. |
그래서 유명한 성이 더욱 흔해지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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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이들에게 신청하는 대로 |
유명성씨의 호적을 준 것은 조선의 양반 성씨들이 |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나온 것이고, |
노비를 양민화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 |
일례로 김좌진 장군댁 노비 100명도 안동 김씨 호적을 만들어 가졌다고 한다. |
조선시대 양반집 법도는 엄격한 유교의 윤리로 교육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
양반으로 행세하기는 행동거지가 참으로 어렵고 엄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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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천민은 흉네 낼 수도, 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는 사회였다. |
현재 품성과 관계없이 성씨로 양반입네 떠드는 사람들은 양반집의 돌쇠이었거나, |
그 마을 "개똥이"였을 확률이 높은 것은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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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은 항상 따르는 권속들에 대한 책임감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
중압감을 느끼며 생활하였으며 자신의 행동이 가문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
오늘같은 막된 행동이나 막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
지역사회에서 한번 쌍놈의 가문으로 찍혀지면 자녀들의 출가 문제로 |
직결되기 때문에 성씨가 그 사람의 품행을 구속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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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도와 예를 생명같이 여기고 살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이런점에서 양반사회는 순기능 역활도 했다고 판단된다. |
성씨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하여 아래의 자료를 첨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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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조사한 우리 나라의 성씨별 인구가 통계청 홈페이지에 떴는데, |
1985년 발표 당시보다 성씨의 숫자가 12 개 늘었다. |
그 때는 274개였는데, 이번은 286개가 되었다. |
우리 나라 10대 성씨의 순위는 변화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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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임(林)... |
“김(金)” 씨는 우리 나라 인구의 21.6%인 992만 여 명으로 여전히 제일 많았다. |
“이(李)” 씨는 그보다 훨씬 적은 14.8%로 679만 여 명으로 조사되었다. |
“박(朴)” 씨는 또 그보다 훨씬 적은 8.5%로 389만 여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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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잇는“최(崔),정(鄭)”씨는 4% 대이고, |
“강(姜), 조(趙), 윤(尹), 장(張)”씨는 2% 대, |
그리고“임(林)”씨부터 21위“전(全)”씨까지 1%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
성씨별 인구 수가 거의 일정한 차이를 유지하며 계속 나열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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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나 일본의 성씨는 1위부터 2, 3위의 분포가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 |
특정 성씨로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없다는데.... |
우리 나라의 경우만 1, 2위가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많아진 것은 |
1900년대 초에 처음 호적법이 시행될 때 “양반이 되고 싶은”사람이 너무 많아서 |
이런 기형적인 분포가 나타났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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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에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정책을 시행하여 |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
각자 자기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을 살린 성씨를 만들어서 가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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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中, 中村, 松下...” 등 |
다양하게 창씨된 성씨의 숫자가 순식간에 8만 개나 되었는데.... |
일본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특정 성씨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는 없다고 하며... |
또한 성씨만 가지고는 가문의 역사 같은 것은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
민족의 역사를 논할 때 성씨가 무언가 하는 것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
일본인들은 당연히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착 같은 것이 거의 없다. |
중국이나 한국과는 여기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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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일본이 우리 나라, 즉 대한제국에 와서도 |
계급을 타파한다면서 “신분 표시가 없는 호적법”을 시행하였고, |
여기에서도“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운동을 전개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결과는 일본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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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삼월이, 오월이..” 들은 |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
이들 대부분이 그 동네 지주나 양반들에게 부탁하여 |
그 “양반님”들의 성씨를 얻어 와서는 관청에 신고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
이 때에 김(金) 씨나 이(李) 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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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특정 성씨가 총 인구의 20%를 넘어 가는 경우는 없는데, |
“양반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던”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난, |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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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우리나라는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자연스러이 이루어졌고, |
옛날 이야기에 그 많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구월이...”의 자손은 |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슨 무슨 정승, 판서의 몇 대 손”이 되어 버렸고, |
오로지 양반의 후손만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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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덕분에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양반이 많은 나라가 되었고, |
또한 제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 불과 100 여 년 전만 해도 |
“성씨도 없는 쌍놈들”은 제사고 차례고 지낼 수가 없었는데, |
요즈음은 집집마다 장손이면 모두 명절날 차례를 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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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5000년 전부터 성씨를 사용해 온 중국의 경우를 보면 |
성씨별 인구 1, 2, 3위의 비율은 각각 7.4%, 7.2%, 6.8%로 되어 있어서, |
특정 성씨로 몰리는 현상은 없다. 중국은 인구 0.1% 이상을 차지하는 성씨가 |
모두 129개로 나타났는데, 이 129개 성씨의 인구 합계는 중국 인구의 87%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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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2006년 1월 10일 중국과학원에서 중국역사상 |
가장 정밀한 자료조사를 거쳐 발표했다는 “100대 성씨”에 근거한 것이다. |
이번 발표에서 “인구기준 성씨순위”가 |
1987년의 발표자료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
이는 표본조사한 기초자료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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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조사는 겨우 57만 명 정도를 표본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고, |
이번 조사는 그 때에 비하여 500배도 넘는 약 3억 명을 표본 조사하여 |
순위를 매긴 것이기 때문에 그 정밀도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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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조사에서 중국 10대 성씨는 |
“이(李), 왕(王), 장(張), 유(劉), 진(陳), 양(楊), 황(黃), 조(趙), |
주(周), 오(吳)”로 판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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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위는 자동적으로 전세계의 10대 성씨가 되기도 한다. |
이 중 “李”는 중국 인구의 7.4%인 9천 60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는데, |
우리 나라의 679만여 명을 합치면 “李”씨는 1억 명을 넘어 가는 세계 유일의 |
성씨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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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900년 전인 서기 1100년대에 북송(北宋)에서 발표한 『백가성(百家姓)』이란 |
책자가 최초의 성씨 조사 기록이었고, 명(明)나라의 『천가성(千家姓)』, |
청(淸)나라의 『백가성(百家姓)』 등이 뒤를 이었으나 이 책들은 모두 성씨별 |
인구수를 기준으로 서열을 매긴 것은 아니었다. |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趙錢孫李周吳鄭王...”으로 되어 |
있으나, 이는 인구수 순위가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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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는 북송을 건국한 황제의 성이었고, |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 성씨였고, |
“정(鄭)”은 그 왕후의 성씨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 강국인 |
“남당(南唐)”의 국왕 성씨였던 것인데... |
(중국의 1100년대는 송나라가 약간 힘이 강한 정도였고, |
고만고만한 나라들로 나누어져서 도토리 키재기로 |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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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인구 순이 아니라 |
예우(?)를 받아야 할 성씨의 순위였고, 최근 중국 일부 신문에서 보도한 |
“900년만에 조(趙)가 1위에서 8위로 밀렸다”는 내용은 |
옛날 기록의 특징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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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나라 성씨의 순위를 기준으로 하여 |
중국 성씨 순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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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 21.59%, 한국 1위 (중국 64위) |
한국 발음이 현재는 “김”이지만 옛날에는 “금”으로 읽었다는 주장도 있음. |
현재 중국 배우 중에도 이 성씨를 가진 배우가 있는데 “금성무”라고 보도되고 있음 |
이 글자의 현대식 중국 표준발음은 “찐”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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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 14.78%, 한국 2위(중국 1위 7.4%) |
한국, 중국 합하면 1억이 넘어 가는 전 세계 단 하나의 성씨임 |
중국, 북한에서는 “리”라고 하는데, 남한에서만 “이”라고 읽고 있음. |
그런데, 남한 사람들도 영어로 쓸 때에는 대부분 “Lee(리)”라고 하는 버릇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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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 8.47%, 한국 3위(중국 100위 내에서는 안 보임) |
한자로 “朴”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바가지”란 뜻의 순우리말 토종 성씨임. |
“박혁거세”의 “박”은 “박만큼이나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은 말임 |
영어로 "Park" "Pak" 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으나 "Paak" 이라고 쓰는 것이 가장 무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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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崔) : 4.72%, 한국 4위(중국 58위) |
정(鄭) : 4.37%, 한국 5위(중국 21위) |
강(姜) : 2.27%, 한국 6위(중국 50위) |
조(趙) : 2.14%, 한국 7위(중국 8위) |
윤(尹) : 2.06%, 한국 8위(중국 95위) |
장(張) : 2.00%, 한국 9위(중국 3위) |
임(林) : 1.66%, 한국 10위(중국 17위/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오(吳) : 1.54%, 한국 11위(중국 10위) |
한(韓) : 1.53%, 한국 12위(중국 26위) |
신(申) : 1.52%, 한국 13위(고려태조가 하사한 성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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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일족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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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徐) : 1.51%, 한국 14위(중국 11위) |
권(權) : 1.42%, 한국 15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
황(黃) : 1.40%, 한국 16위(중국 7위) |
안(安) : 1.39%, 한국 17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
송(宋) : 1.38%, 한국 18위(중국 23위) |
유(柳) : 1.31%, 한국 19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
홍(洪) : 1.13%, 한국 20위(중국 99위) |
전(全) : 1.07%, 한국 21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고려 왕씨 유래설이 있음) |
고(高) : 0.95%, 한국 22위(중국 19위) |
문(文) : 0.93%, 한국 23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
손(孫) : 0.90%, 한국 24위(중국 12위) |
양(梁) : 0.85%, 한국 25위(중국 20위) |
배(裵) : 0.81%, 한국 26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
조(曺) : 0.79%, 한국 27위(중국 27위) |
백(白) : 0.76%, 한국 28위(중국 79위) |
허(許) : 0.65%, 한국 29위(중국 28위) |
남(南) : 0.56%, 한국 30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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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31위 이후의 성씨는 다음과 같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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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0 심(沈) 유(劉) 노(盧) 하(河) 전(田) 정(丁) 성(成) 곽(郭) 차(車) 유(兪) |
41-50 구(具) 우(禹) 주(朱) 임(任) 나(羅) 신(辛) 민(閔) 진(陳) 지(池) 엄(嚴) |
51-60 원(元) 채(蔡) 강(康) 천(千) 양(楊) 공(孔) 현(玄) 방(方) 변(卞) 함(咸) |
61-70 노(魯) 염(廉) 여(呂) 추(秋) 변(邊) 도(都) 석(石) 신(愼) 소(蘇) 선(宣) |
71-80 주(周) 설(薛) 방(房) 마(馬) 정(程) 길(吉) 위(魏) 연(延) 표(表) 명(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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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0 기(奇) 금(琴) 왕(王) 반(潘) 옥(玉) 육(陸) 진(秦) 인(印) 맹(孟) 제(諸) |
91-100 탁(卓) 모(牟) 남궁(南宮) 여(余) 장(蔣) 어(魚) 유(庾) 국(鞠) 은(殷) 편(片) |
101-110 용(龍) 강(疆) 구(丘) 예(芮) 봉(奉) 한(漢) 경(慶) 소(邵) 사(史) 석(昔) |
111-120 부(夫) 황보(皇甫) 가(賈) 복(卜) 천(天) 목(睦) 태(太) 지(智) 형(邢) 피(皮) |
121-130 계(桂) 전(錢) 감(甘) 음(陰) 두(杜) 진(晋) 동(董) 장(章) 온(溫) 송(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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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40 경(景) 제갈(諸葛) 사공(司空) 호(扈) 하(夏) 빈(賓) 선우(鮮于) 연(燕) 채(菜) 우(于) |
141-150 범(范) 설(?) 양(樑) 갈(葛) 좌(左) 노(路) 반(班) 팽(彭) 승(承) 공(公) |
151-160 간(簡) 상(尙) 기(箕) 국(國) 시(施) 서문(西門) 위(韋) 도(陶) 시(柴) 이(異) |
161-170 호(胡) 채(采) 강(强) 진(眞) 빈(彬) 방(邦) 단(段) 서(西) 견(甄) 원(袁) |
171-180 방(龐) 창(昌) 당(唐) 순(荀) 마(麻) 화(化) 구(邱) 모(毛) 이(伊) 양(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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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90 종(鍾) 승(昇) 성(星) 독고(獨孤) 옹(邕) 빙(?) 장(莊) 추(鄒) 편(扁) 아(阿) |
191-200 도(道) 평(平) 대(大) 풍(馮) 궁(弓) 강(剛) 연(連) 견(堅) 점(占) 흥(興) |
201-210 섭(葉) 국(菊) 내(乃) 제(齊) 여(汝) 낭(浪) 봉(鳳) 해(海) 판(判) 초(楚) |
211-220 필(弼) 궉(?) 근(斤) 사(舍) 매(梅) 동방(東方) 호(鎬) 두(頭) 미(米) 요(姚) |
221-230 옹(雍) 야(夜) 묵(墨) 자(慈) 만(萬) 운(雲) 범(凡) 환(桓) 곡(曲) 탄(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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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40 종(宗) 창(倉) 사(謝) 영(永) 포(包) 엽(葉) 수(水) 애(艾) 단(單) 부(傅) |
241-250 순(淳) 순(舜) 돈(頓) 학(?) 비(丕) 영(榮) 개(介) 후(侯) 십(?) 뇌(雷) |
251-260 난(欒) 춘(椿) 수(洙) 준(俊) 초(肖) 운(芸) 내(奈) 묘(苗) 담(譚) 장곡(長谷) |
261-270 어금(魚金) 강전(岡田) 삼(森) 저(邸) 군(君) 초(初) 영(影) 교(橋) 순(順) 단(端) |
271-280 후(后) 누(樓) 돈(敦) 소봉(小峰) 뇌(賴) 망절(網切) 원(苑) 즙(?) 증(增) 증(曾) |
281 삼(杉) : <남자 2명> |
282 우(宇): <남자 1명> 소(肖)예(乂) 빙(氷) 경(京) : <여자 각 1명> |
(이상 총 286개 성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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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최근에 새로 생긴 성씨 중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잘못 기재하여 그리 된 것도 |
있고, 국제 결혼으로 우리 나라 국적을 취득한 동남아 또는 중국 사람들의 성씨도 |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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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대 중국의 주요 성씨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李 : 중국 7.4%, 중국 1위(한국 2위) |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개국공신들에게 “李”를 하사했고, |
나중에 후위(後魏)의 선비족(鮮卑族)에서도 “李”씨로 바꾸어 사용한 사람들이 많음 |
중국인들은 영어로 표기할 때 "Li"를 주로 사용하며, |
미국 "Lee"와의 관계는 불명확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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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 : 중국 7.2%, 중국 2위(한국 83위) |
중국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사이의 신(新)나라 때 황제 왕망(王莽)의 성씨임. |
중국 사람이라 하면 “비단장사 왕서방”이라 할 정도로 중국에 왕 씨가 많았음 |
한국에서도 고려시대 왕족이 “왕건(王建)”의 왕씨였으나 고려 멸망 이후 거의 |
자취를 감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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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 : 중국 6.8%, 중국 3위(한국 9위) |
장삼이사(張三李四 : 중국인들은 대개 張씨네 셋째 아들 아니면 李씨네 넷째 |
아들이라는 뜻)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張씨가 많았음. |
지금도 “장가계(張家界)”는 관광지로 유명함.“왕삼이사(王三李四)”란 말이 |
생기지 않은 것은 “왕이 셋이면..”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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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유) : 중국 4위(한국 32위) |
陳(진) : 중국 5위(한국 48위) |
楊(양) : 중국 6위(한국 55위) |
黃(황) : 중국 7위(한국 16위) |
趙(조) : 중국 8위(한국 7위) |
周(주) : 중국 9위(한국 71위) |
吳(오) : 중국 10위(한국 1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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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서) : 중국 11위(한국 14위) |
孫(손) : 중국 12위(한국 24위) |
朱(주) : 중국 13위(한국 43위) |
馬(마) : 중국 14위(한국 74위) |
胡(호) : 중국 15위(한국 161위) |
郭(곽) : 중국 16위(한국 38위) |
林(임) : 중국 17위(한국 10위) |
何(하) : 중국 18위(한국에는 없음) |
高(고) : 중국 19위(한국 22위) |
梁(양) : 중국 20위(한국 25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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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정) : 중국 21위(한국 5위) |
羅(나) : 중국 22위(한국 45위) |
宋(송) : 중국 23위(한국 18위) |
謝(사) : 중국 24위(한국 233위) |
唐(당) : 중국 25위(한국 173위) |
韓(한) : 중국 26위(한국 12위) |
曹(조) : 중국 27위(한국 27위) / 한국에서는 “曺(조)”란 글자를 주로 사용함 |
許(허) : 중국 28위(한국 29위) |
鄧(등) : 중국 29위(한국에는 없음) |
蕭(소) : 중국 30위(한국에는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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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1위부터 100위까지는 다음과 같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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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0 馮(풍),曾(증),程(정),蔡(채),彭(팽),潘(반),袁(원),于(우),董(동),余(여), |
41-50 蘇(소),?(협),?(여),魏(위),?(장),田(전),杜(두),丁(정),沈(심),姜(강) |
51-60 范(범),江(강),傅(부),?(종),?(노),汪(왕),戴(대),崔(최),任(임),?(육) |
61-70 廖(료),姚(요),方(방),金(금),邱(구),夏(하),?(담),?(위),?(가),?(추) |
71-80 石(석),熊(웅),孟(맹),秦(진),?(염),薛(설),侯(후),雷(뢰),白(백),?(용) |
81-90 段(단),?(학),孔(공),邵(소),史(사),毛(모),常(상),万(만),?(고),?(뢰) |
91-100 武(무),康(강),?(하),?(엄),尹(윤),?(전),施(시),牛(우),洪(홍),?(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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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측 발표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성씨는 5 |
6개 종족에 약 12000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
13억 인구 전부를 조사 못해서 이런 추정치라는 것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최신판 『중국성씨대사전(中國姓氏大辭典)』에는 무려 23000개의 성씨가 |
소개되어 있다. |
우리는 중국, 한국, 일본의 성씨에 대한 역사나 인식들에 대하여 |
약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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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중국의 성씨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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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예로부터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
원래 성(姓)이라 함은 모계제 사회의 흔적으로 “어머니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
말이었고, 씨(氏)는 “출생한 뒤에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중국인들이 모두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황제(黃帝)”의 경우 성(姓)은 |
“희(姬)”이고 씨(氏)는 “헌원(軒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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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중에는 성격이 조금 바뀌어 황제(皇帝), |
즉 천자(天子)가 내려 주는 것은 성(姓)이라 했고, |
제후(諸侯) 또는 국왕(國王) 정도가 내려 주는 것은 씨(氏)라 했다. |
언제나 성(姓)이 한 단계 위의 개념이었는데, |
보통 성(姓)은 한 글자였고 씨(氏)는 두 글자가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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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漢) 나라 때에 족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
이는 천자가 각 제후나 공신들의 자제들에 대한 특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
그 때부터 천자가 만든 족보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가 |
권력의 유무를 판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
언제부터인가 성씨는 남자들만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
생물학적으로 특정한 Y염색체의 유전 상황을 표시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
어쨌든 중국의 성씨는 역사가 5000년이 되었고, |
성씨는 문화의 전승과 남성 혈통의 흐름을 연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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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은 “같은 성씨이면 무조건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관습이 |
자연스러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혈연 관계는 인간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기도 하고, |
또 때로는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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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한국의 성씨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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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리 나라의 토착민들은 성씨가 없었다고 한다. |
계속적인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일부 고위 관리들에게서 성씨를 가진 자들이 |
간간이 나타났고, 삼국시대 말기 신라에서는 국력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
왕족을 중심으로 성씨를 스스로 만들어서 가졌다. |
그래서 왕족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고 없는 먼 조상님들(혁거세, 알지 |
등등)에게도 소급해서 성씨를 만들어 붙이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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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양반보다 쌍놈들이 더 많았고, |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
대한제국 시절 일본의 압력 덕분에 호적에 성씨란 것을 |
처음으로 만들어 올린 사람들도 많았지만,“만들어 올렸다”는 그 사실은 |
언제까지나 “가문의 비밀”로 숨겨 두어야 했다. |
성씨의 유무와 관련한 성씨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우리 백성들은 |
양반제도가 비록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
이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만큼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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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에 일본이 “이제 조선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한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
일본식으로 창씨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고, 앞으로 성씨로 인한 |
조선인, 일본인 간의 차별대우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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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자체를 “가문의 역사”로 생각하는 많은 우리 백성들은 당연히 반대하였고, |
성씨의 역사가 불과 50년밖에 안 되어 성씨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없었던 |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들의 반대를 보고 “거참, 이상하다. |
그깟 성씨 가지고 왜들 저러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
성씨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씨를 만들어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신청 첫날 아침에 맨 먼저 신고하였는데, |
이광수가 만든 성씨는 “일본 천황 고향의 뒷산인 향구산(香久山)의 이름에서 |
따 왔다는” 향산(香山)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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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
“성씨란 건 별 것 아니야”라는 자기네들의 전통적 인식을 |
한국식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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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지금의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
전 세계의 남자들이 한국인들에게 깜짝 놀라는 것이 두 가지라 하는데, |
한 가지는 부인의 성씨 문제이고 또 한 가지는 “부인이 남편 통장을 관리”하는 |
것이라 한다. |
“자다가 벌떡 깨어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
그들이 보는 한국은 거의 구제불능성 선천적 여성천국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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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일본의 성씨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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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우리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백제와 교류할 때부터 성씨의 필요성을 크게 |
느끼지 못했고, 오랜 기간 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가물에 콩 나듯 하는 |
중국과의 교류도 크게 활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성씨의 위력에 대해서는 |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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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미국이 군함을 밀고 들어오고, 일본 청년들이 세계일주도 하는 과정에서 |
외국인들이 “패밀리 네임”이란 것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을 보니 자기네들의 직업을 가지고 만든 성씨도 있고, |
자기네 마을의 특징을 살려서 만든 성씨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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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본도 성씨란 걸 만들어서 쓰기로 하였다. |
그런데, 일본의 학자들에게 물어 보니 동양 문화권에서는 성(姓)이라는 것도 있고 |
씨(氏)라는 것도 있는데.. 성(姓)이란 것은 황제가 직접 만들어서 |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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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한두 명도 아닌데 어느 세월에 만들어서 준단 말인가... |
그냥 일본은 씨(氏)를 만들어서 쓰기로 하고 창씨(創氏)하는 업무는 |
각 사무라이들에게 그냥 맡기기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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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통하여 순식간에 수만 개의 씨(氏)가 만들어졌는데... |
지금도 일본은 어떤 장부이든지 “성명(姓名)”이란 칸은 없고 어디든지 모두 |
“씨명(氏名)”이란 칸만 있다. 19세기 말 갑자기 시행된 창씨(創氏)였기 때문에 |
각자의 씨(氏)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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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게도 성씨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
호적법을 만들어 창씨(創氏)의 기회를 주었으나, |
조선인들은 이상하게도 창씨(創氏)는 않고 기존 양반들의 성(姓)을 빌려 와서 |
관청에 신고하는 모습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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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글자 짜리인 성(姓)을 사용하는 사람은 중국 또는 |
조선인이고 두 글자 짜리 씨(氏)를 쓰는 사람은 일본인.... |
어찌 되었든 간에 국적 구별이 쉬워서 좋기는 했다. |
조선을 삼키고 난 뒤에 조선인들로부터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해 놓고는 |
차별대우가 너무 심하다”는 등 불만사항이 많이 접수가 되었지만, |
우선 이름에서부터 출신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니 |
일본 정부로서도 별로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 그냥 대충 세월만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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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들이 매일매일 죽어 나가고... |
조선인들이라도 군인으로 뽑아서 내보내야겠는데 차별대우 해소를 위한 |
근본대책을 세우라고 매일 투덜대는 저 조선인들을 그냥 일본군으로 들여 |
보냈다가는 전투도 제대로 못해 보고 질 것 같고... 일본정부는 착잡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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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묘안을 냈다. |
일본식으로 창씨(創氏)할 기회를 한 번 더 줄 터이니 |
이 참에 일본식으로 제대로 창씨를 해라... |
어차피 얼굴 생긴 것도 똑같고.. 조선 출신을 차별대우하고 싶어도 |
조선 출신이란 표시가 없으니 못할 것 아니냐... |
그러나 그대신 조선 청년들 군대에 좀 가 줘야 되겠다.... |
이렇게 하여 1940년대에 창씨(創氏)할 기회를 주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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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
“어떻게 그 동안 써 오던 성(姓)을 버리고 |
그보다 격이 낮은 씨(氏)를 쓸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
일본인들로서는 얼른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었다. |
이미 오래 전에 법적으로 양반이란 것도 없어졌고 문벌이란 것도 이제 |
큰 의미가 없어졌는데 허울만 남은 성(姓)을 가지고 왜 그리 집착을 |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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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차별대우 철폐란 것이 어차피 민간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문제이고 |
정책 차원에서 조선출신이라는 표시가 안 나게 해 주겠다는 것인데... |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불만에 대해 잘 이해가 안 갔지만 |
그래도 강제 창씨를 계속 밀고 나갔다. |
(이 때 林, 柳, 南씨 일부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라 하여 새로 창씨를 하지 |
않았다고 함).... |
그리고 조선인들을 일본군으로 받아 들여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사람들만 일본군복을 입은 채로 애매하게 죽은 |
셈이 되어 버렸고 몇 년 후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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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전쟁도 끝이 나고 살림살이도 일본 내부로 축소되었으니 |
일거리도 줄어들고 오히려 편해졌다. |
일본인들도 이제 성씨를 사용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간다. |
100년 동안 의 짧은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성씨에 대한 관념을 |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성씨에 대한 |
뚜렷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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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일본인은 성씨의 종류는 8만여 가지로 무지하게 많지만 |
성씨별 인구 수에 대해서는 아직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
우리나라 양반의 자손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일본인은 "근본도 모르는 |
쌍놈들"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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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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