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례역사

[스크랩] 백운지 단소의 내력(2)

지와이원 2012. 4. 4. 00:38

 

白雲池傳疑碑 識

 

吾金氏在麗朝世居禮安縣自始祖戶長公歷三世戶長至奉翊中顯奉善三大夫凡七世墳塋世傳在縣北白雲山乃爲他人所占葬其上下今有二封頹塋在中榦上處可知其爲最先入葬而自此而降南出數枝纍纍然有十餘墳皆無碑誌可驗嗚呼可勝痛哉奉善公之子官郎將郎將公子縣令公始移家榮州榮之距禮安纔一日程縣令公二男爲校理爲冢宰冢宰公仲子縣監公又來住山下十餘里子姓之在榮土者寔繁有後則不知何時失於守護爲人所占取也嘗聞故老相傳云此山一名正字洞盖冢宰公初爲集賢殿正字集賢當世高選正字殿中極望山中之民見基來省先墓咨嗟贊賞至以名基洞然則此山之爲吾家先壟及此時之猶不失守護皆無疑而冢宰公之伯氏校理公旣早卒無嫡嗣冢宰公又早世而長子訓鍊公無子男縣監公以仲子承祀而又無子宗嗣累絶最後縣監公之弟生員公之後始克承宗基間之闕於省掃或事勢之所難免也當是時墓下之居民鮮稀山徑之卉木茂翳至使他人不詳基爲誰家墳塋而占葬基間也歟是誠不可考巳東方之金大抵多本於羅王而又有金海英陽之金由戶長公以上無書籍可徵然四世之後三世官大夫縣令公實當 我國之初而冢宰公爲 世文朝名臣 贈諡文節立祠二邑自是而賢人君子彬彬間出生而有德行事業歿而祀鄕祠里社大小科第之盛內外本支之繁至于今二十有餘世則吾先祖積仁種德以有基餘慶者爲何如而乃反對塋莫護奠掃無地無可以小伸追報之誠基爲子孫百代之痛恨曷有窮哉始於 肅廟庚申門中諸父老式遵先世遺志設壇山足列次七世昭穆而祭之自是厥後每五年一祭近年以來措置若干祭田復以三年一祭爲永世遵行之規盖自始祭至今爲一百有十數年矣特以莫的供虔以義起禮而無憑無依祭如不祭祭畢而散則又復慨廓悠邈無所寓慕謀所以築壇墠竪表石以爲瞻依之所者亦旣有年今 上二十年丙辰春始就山下相望處纍土爲壇越二年戊午伐石竪壇上表之曰宣城金氏七世墳塋傳疑之碑俾後世子孫有以知此山中有吾先祖憤塋云詞曰山上兮列塋山下兮片石千秋兮世萬靈髣髴兮來格又爲之戒曰旣失我之山兮母傷我之石山可夷石可轉子孫報祀兮世世無斁

戊午四月 日

後孫 通訓大夫前行司諫院獻納 若練 撰

 

 

백운지 전의비지(白雲池 傳疑碑識: 전의 비는 의문 나는 점을 적어 후손에게 전하는 비)

우리 김씨는 고려조 때 예안현에서 대대로 살았다. 시조로부터 호장을 지내셨고 오(五)세는 봉익대부(奉翊大夫: 고려시대 종二품의 품계), 육(六)세는 중현대부(中顯大夫: 고려시대 종三품 품계), 칠(七)세는 봉선대부(奉善大夫: 고려시대 종四품 품계)를 지내셨다.

이상 칠(七)세의 산소가 예안현 북쪽 백운산에 모셔져 있었다고 대대로 전해왔는데 그 산이 다른 성씨(봉화금씨)의 점장(땅을 차지하고 장사지냄)한 바가 되었다. 지금도 그 묘소의 아래 위에 두 기(基: 묘를 세는 단위)의 묘가 봉분이 허물어진 채 가운데 산줄기 위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맨 먼저 묘를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면 남쪽으로 몇 개의 산줄기가 나와 있고 그곳에 십(十)여기의 무덤이 다닥다닥 연이어 있는데 모두가 비석이나 지석이 없어 증명할 수가 없으니 아! 이 슬픔 어이하리요.

봉선공(휘 방식:方軾)의 자(子)가 낭장(郎將:고려시대 무관의 정 六품) 벼슬을 하셨고 낭장공의 자(子)가 현령공(縣令公)의 휘(諱) 소량(小良)께서 비로서 영주로 이사하셨는데 영주에서 예안까지의 거리는 하루에 왕래할 수 있는 거리밖에 안 된다. 현령공은 이(二)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교리(휘 증(潧): 校理: 조선시대 홍문관의 정五품 벼슬)이고, 차남은 총재(冢宰: 이조판서의 딴 이름)의 벼슬에 올랐으며, 총재공 휘 담(淡)의 둘째 아들 현감공(縣監公 諱만균(萬鈞)은 다시 백운산에서 십(十)여리 떨어진 곳에 와서 살으셨다. 영주지방에서 사는 자손이 이처럼 번창한 대도 불구하고 언제 실전하여 남이 차지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찌기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산 아래 일명 정자동(正字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총재공(문절공)께서 처음에 집현전(集賢殿)정자(正字)로 계셨는데 집현전은 당세의 우수한 인재들이 엄격한 시험을 거쳐 선발되고, 정자벼슬은 집현전 가운데서도 유망한 벼슬이었으므로 산아래 백성들이 공께서 성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공을 아끼고 부러워한 나머지 동리 이름까지 정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이 백운산이 분명 우리 김씨의 선영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실전하지 않았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총재공의 백씨 교리공(휘증: 潧)께서 정실 소생 없이 일찍 별세하셨으며 총재공의 장자인 훈련공(휘 만석: 萬石)께서도 아들이 없어 혐감공(휘 만균:萬鈞)이 그의 중자로 제사를 잇게 하였는데 그도 또한 아들이 없어 종가의 후손이 여러 번 끊기게 되었다.

최후로 현감공의 동생 생원공(휘 만칭:萬稱)의 후손이 비로소 종사를 잇게 되었으니 이런 동안에 성묘를 궐하였음은 사세 부득이한 일로 여겨진다. 이때에 이르러 산소 아래에는 민가가 드물고 산길에는 풀과 나무가 우거져 어느 무덤이 누구의 집 무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 그 옆이나 아래 위에 다른 성씨의 사람들이 점장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자세한 것은 더 이상 상고할 길이 없다.

대저 우리나라의 김씨성은 신라왕족인 김씨를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또 김해김씨 그리고 영양김씨가 있는바 우리 김씨는 시조이신 호장공 이상의 선계는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호장공 이하(四)세까지는 호장 그 후 삼(三)세는 대부의 벼슬을 지냈으며 현령공(소량:小良)께서는 조선조 초기의 벼슬을 하신데 이어 총재공께서는 세종 문종조의 명신으로서 문절(文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을 뿐 아니라 두 고을에서 공을 제사 지내고 학덕을 우러르는 사당이 세워졌다. 이로부터 훌륭한 인물들이 끊이지 않고 출세하여 살아서는 덕행과 사업으로 이름을 드날리고 죽어서는 향리에서 우러러 제사지내며, 대과(大科), 소과(小科)에 오른 사람이 많고 내외 모든 자손들의 번창함이 이십(二十)여대에 이르니 이는 선종의 음덕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선영을 지키지 못하고 성묘할 곳이 없어 선조를 사모하고 은공에 보답하려는 조그마한 정성마저 펼 수가 없게 되었단 말인가? 자손된 자 백대에 이르기까지 가슴 아픈 한이 어찌 가실 수 있으리요.

이에 비로소 숙종 경신(肅宗 庚申: 一六八○)년에 이르러 문중 어른들이 선대어른들의 뜻을 받들어 백운산 기슭에 설단을 하고 시조이하 칠(七)세의 위패를 차례대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오(五)년에 한번씩 제사를 올리다가 근년에 와서 약간의 위토를 마련하고 다시 삼(三)년에 한번 씩 제사를 올리는 것을 영원히 지키도록 하였는데 처음 제사를 올린 때부터 이때까지 일백 십 수 년이 되었다. 특히 경건한 마음으로 제수를 갖추어 의와 예로 제사를 올리지만 기대고 의지할 곳이 없으니 제사를 지내고도 지내지 않은 것 같아 제사를 마치고 각각 흩어지고 나면 또다시 슬퍼지고 허전하여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표석을 세워 우러러 의지하는 장소로 하자는 의논을 한 지 몇 해 뒤인 정조 이십(二十)년 병진(一七九六)봄에 산소 가까운 산 아래에 흙을 쌓아 단을 만들고 이(二)년 뒤인 무오(一七九八)년에 돌을 깎아 단위에 세우고 선성김씨 칠세분영 전의지비(宣城金氏七世墳塋 傳疑之碑)라 새겨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이 산중에 우리 선조의 산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게 함이로다.

이어 글을 지어 말하되

산위에는 여러대 선영이요

산아래에는 한조각 비석이 서있네

오랜세월 많은 조상영혼 오신듯 하여라

또 경계하여 말하되

어쩌다 우리 산은 잃었지만

비석만은 상하지 않게 하라

산은 옮기고 비석은 궁굴수 있어도

자손들 제사 받드는 마음만은 대대로 변함 없으리

무오(戊午:一七九八)년 사월(四月) 일

후손 통훈대부(後孫 通訓大夫)

전행 사간원 헌납(前行司諫院 獻納) 약련(若鍊) 지음(撰)

 

주(註) ①집현전(集賢殿): 고려때 諸館殿의 하나, 一四년(一 一 三六) 延英殿을 집현전이라 불렀다가 존폐를 거듭하였음. 조선왕조 초기 經籍 ․ 典故 ․ 進講 등에 관한 일을 맡았다가 世宗 二年(一四二○)에 기구를 확장하여 많은 학사를 두고 侍講과 玉室敎育 및 古制의 연구와 편찬사업을 담당함. 훈민정음의 창제 등 많은 업적을 남겼음. 世祖 二年(一四五六) 사육신의 사건에 관련되어 폐하였다가 成宗 즉위년 (一四七○)에 弘文館으로 기구를 바꾸었음.

②정자(正字): 조선시대 集賢殿 弘文館 承文院 등의 정九품 벼슬로 정원은 二명이었다.

③시호(諡號): 帝王, 公卿, 儒賢 등에게 그들의 생전의 행적에 따라 죽은 뒤에 임금이 내려주는 칭호

                                                                                                              宣城金氏 世譜 에서

출처 : 禮安(宣城)金氏 인터넷 宗親會
글쓴이 : 김한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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