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사찰

[스크랩] 안동 겸암정사

지와이원 2012. 12. 14. 22:09

 

 西崖先生爲伯氏謙菴先生建亭韻(서애선생위백씨겸암선생건정운)   겸암정사 입구 碑-
     我兄遺亭館(아형유정관): 내 형님  정자지어,    

     謙巖有舊名(겸암유구명): 겸암이라  이름지었네,
    竹影淨臨階(죽영정임계): 대나무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梅花開滿庭(매화개만정): 매화는 뜰가득 피어있구나,
    遊종芳草合(유종방초합): 발끝엔 향그런 풀냄새 모이고,
    仙路白雲生(선로백운생): 호젓한 길에는 흰안개 피어나네,
    창憶空垂淚(창억공수루): 그리움 눈물되어 소리없이 내리고,
    江流夜有聲(강유야유성): 강물도 소리내며 밤새흐르네.
     光復後壬午年菊秋節  十三代孫諱時福의 遺志를 받들어  圭夏 謹竪.  傍裔孫  世榮 謹書    (壬午 2002)년.

 

 겸암정사 입구

  겸암 류선생 시 받들어 차운함.    겸암정사

   가파른 암벽 붉은 벼랑은 아득하고 깊은데,  구름 안개 사라지니 천길이나 푸르구나 
   중천에 달은밝고 산은 고요하고 적적한데,   나는 듯이 뛰어 올라 소리 높이 읊었네.
                                         조선조 명종19년 1654년 4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청량산 갔다가 선생의 운에 따라 지음             

             문경공 겸암선생 운룡의 친필을 복사하여 을유년 2005년 첫여름에 14대손 청하가 세우다.

 

 

 정사 본채

 

 

 누마루 밑의 방 아궁이

 

 누마루와 툇마루

 

 謙菴精舍記. 歲丁丑七月之旣望: 정축년(1757년영조33년)7월16일, 韓山李象靖 謹記(한산 이상정 근기)

 

 退溪 李滉, 松庵 權好文, 舍第 成龍의 詩文.

      退溪 李滉(퇴계 이황. 1501 연산군 7∼1570 선조 4). 

      松巖 權好文(송암 권호문. 1532 중종 27∼1587 선조 20).                                                        

      舍第 成龍   西厓 柳成龍(서애 류성룡, 1542 중종 37∼1607 선조 40)

 

 謙菴亭(겸암정) 현판은 스승인 이황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퇴계 이황선생께서는  현판을 써주시며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聞君構得新齋好(문군구득신재호) 듣건데 그대가 세집을 잘 지었다는데
               欲去同狀恨未如(욕거동장한미여) 가서 같이 하룻밤 보내려 하나말미를 얻을수 없어 아쉽네.

 

  講習齋 강습재(강설하고 익히는 곳)

 

  闇修齋 암수재(조용히 학문을닦아간다는 뜻)

 

 누마루 전면을 원주로 세웠다.

 

 누마루에서 하회마을 쪽

 

 살림채의 안채

 

 虛受寮(허수료): 원진해(1594~1651).      배우고 싶으나 돈이없는사람에게는 돈을받지않고 가르쳐준다는뜻.

 

  안채의 연등천정

 

  안채 대청마루에서 옆으로난 툇마루로 가는 모퉁이의 삼각형가설이 지혜롭다.

 

 

                     안채 ▼                                               좌익랑채 누마루  ▼                                               정사 본채 배면  ▼

 

  겸암정사의 안채 좌익랑 누마루

  謙菴亭講修?(겸암정강수계). 每年 四月 初正日에 모임이 있다고한다,  

    講道修德(강도수덕): 도리를 강론하고 덕을 닦는다.
    講信修義(강신수의): 믿음을 강론하고 의리를 닦는다.
    講戚修誼(강척수의): 친족의 도리를 강론하고 우의를 닦는다.

 

  살림채의 우익랑 디딜방아간채

 

  겸암정사 사각대문을 통하여 몸채와 안채로 출입한다.

 겸암정사 사주문

 

  능파대로 오가는 길

 

  능파대에서 내려다본 형제바위

 

安東 河回  謙菴精舍(안동 하회 겸암정사)     경북 안동시 풍천면 풍일로 181 (광덕리)

이 집은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맏형인 겸암 유운룡(1539∼1601) 선생이

1564년(명종 19) 학문 연구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하회마을 북쪽 화천(花川)을 끼고 우뚝 솟은 부용대(芙蓉臺)의 서쪽, 옥연정사(玉淵精舍)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전체 평면은 ㅁ자형으로 전면에 정사의 몸체가 정면 4칸, 측면 2칸, 이의 뒤쪽에

안채인 살림채가 ㄷ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잡고 있다.
 

몸채는 서쪽에서부터 방 2칸, 대청 4칸을 두고 다시 앞쪽으로 대청 1칸, 뒤쪽으로 방 1칸을 두었으며,

전면과 좌우에 툇마루를 달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사 몸체는 누(樓)의 형식을 갖추어서, 동쪽 면 누마루 밑으로 정사 마당에 출입할 수 있다.
정사의 온돌방과 대청에의 출입은 살림채와의 사이에 세운 대문을 들어가 정사 몸체의 대청 뒷벽에 단 문을 통하여만 가능하다.
 

◐步出河上 船渡立巖 宿謙巖精舍(보출하상 선도입암 숙겸암정사)◑

걸어서 강가로 나와 배를 타고 입암으로 건너가, 겸암정사에서 묵다.(류성룡시 39쪽에서)
曳杖行沙岸(예장행사안) 지팡이 짚고 걸어서 모래언덕에 나와,
呼船過水村(호선과수촌) 배를 불러 타고 강 건너 마을로 갔네.
薄雲巖際宿(백운암제숙) 엷은 구름 휘감긴 암벽 곁에 묵는데,
孤月浪中?(고월낭중번) 외로운 달이 물결 속에서 일렁이네,
煙樹千家靜(연수천가정) 안개 깔린 수목 속에 온 동네가 조용한데,
秋蟲四壁喧(추충사벽훤) 가을벌레 울음소리 사방에서 요란하네,
獨來無晤語(독래무오어) 홀로 와서 말 건넬 사람 없으니,
愁思滿江軒(수사만강헌) 가을시름이 강변 난간에 가득하네.

 

◐겸암 정사기◑
정사가 하회마을의 입암 위에 있으니, 겸암 류 선생이 거처 하시면서, 자호로 삼았던 곳이다,
영가는 예부터 이름난 산수가 많다고 하나, 동남쪽이 더 수려하며 기절 하고,그중에서도 하회일대가 가장 뛰어났다,

강물 따라 수 백리 사이에는, 맑은 소(沼) 좋은 나루와, 기이한 암벽과 빼어난 산줄기가,

곳곳에 뒤섞여 별처럼 나열해있는데, 하회 한 구비를 첫머리로 꼽는다,

 

하회마을 아래위로,  능파 ,달 관대와 옥연 ,상봉, 원지정사와 , 더불어서 도화 천과 만송주등 여러 승경들은,

모두영묘하게 뛰어나서, 바라보면 흡사 신선이사는 별천지 같으나, 유독이 정자가 더욱 아름답다,

대저 하회는, 안동에서승지의 제일로 드러났고, 이정자가 또한 하회의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고 있다,
무릇 흰모래사장과 옥 같은 자갈의 벌이 넓고 아득하게 펼쳐 저 있고

백길 푸른 절벽이 우뚝한 그 밑으로 푸른 강물이 유유히 감돌아 흐르는데 물안개는 아득히,
나무 숲 사이에 엉키어 흐릿하게 보여, 아침과 저녁으로 변화하는 장면을, 모두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다

 

아늑한 집안의 뜰을 조심스레 거니는 사이에, 그 소유한 바가, 이미 넉넉하고 많지는 않지만,

정자가 있는 곳은 두 암반사이에 서있어, 골짜기가 넓고 깊으나,
집은 그윽한 곳에 있고 지세는 높아, 강기슭을 따라서 지나가면서, 옆으로 흘켜 보면, 

벼루의 암벽과 칡덩굴사이로 은연히 가리워져 보일락 말락하며,
왕왕 이정자가 있는 줄도 모를 지경이다,

 

대저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안으로는 넉넉하면서도 밖으로는 검소해 보이는 것은, 모두"겸(謙)에 가까운 뜻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정자에서 거처 하실 때, 옷을 걷고 오르내리며, 작지를 짚고 서서 그 원류를 즐기며,

무릇 맑은 물소리를 귀로 듣기도하고, 옥빛처럼 선명한 물빛을 눈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

모두 인(仁)과 지(智)를 체득하여 풍영의 취향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고,
천지의 영허(盈虛)의 도와, 산천 손익의 묘한 이치를, 진실로 묵묵히 자연그대로 따르면서도 감상하는 순간에 깨달았다,

미쳐 그 흥이 극도에 이르면 돌아왔다,

 

방안은 밝고 비었는데, 좌우가 도서로 쌓여있어, 만상이 태극의 일리에 모여 함유되어 있음을 알았다,
학문은 이미 성취하였는데도, 오히려 부족한 것 같이 여겼고, 도(道)도 이미 깨달았음에도, 그렇치 못한 것 같이 여겼으나,

다른 사람들은 보기를, 인격이 워낙 높아서 밝은 빛이 난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모자라는 듯이 여겨 날마다 부지런히 힘썼으며, 이것은 종신토록 변치않았다,

 

주역의 겸괘(謙卦)에 형상하기를,

"謙謙君子, 卑以自牧",(겸겸군자 비이자목)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말은 참으로, 선생께서 실천에 옮김이 있으니,
그런즉 , 이정자는,

진실로 선생을 만나서 그 절승을 드러냈고, 선생 또한 이정자로 인하여,

산책하며 음영(吟詠)하는 운치를 길렀으나, 선생의 즐거움은, 초연히도 산수밖에 있었으니,

처음부터 이정자는 유무에 무었을 더하고 뺄 것이 있었겠는가,

선생은 동생 서애선생과 더불어, 퇴도 부자의 문하에 종유하여, 그심 법 전수의 묘를 이어받았고,

겸암정사란 편액을 받아, 여러 미간(楣間)에 붙였다, 

서로 더불어 굳게 맺고 정연(精硏)하던 이 정사와 옥연정사 사이에는, 물안개가 끼이는 구역으로서,

조용히 자연스럽게 인의(仁義)와 도의의 고장으로 드러났으며,
옛날의 용문과 무의(주자)와 더불어, 명망이 천년토록 드러났으니,  그 어찌 산수의 다행이 아니라 할까보냐 ?

 

정자가 오래되어 허물어지니, 또한 대현의 마음 자취가, 숨겨져 전하지 못해서, 그 유풍 여운이, 날로 희박해가고,

지나가는 길손들도, 머뭇거리며 애석해하자, 후손 영 씨가, 슬프게여겨 이제 개축할 마음을 굳혀,

몇 해 동안 주선해서 이룬 것인데, 그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다 이루었다는 것은,

의심컨데 선생께, 옳치 않을 것이다.

무릇 선생의 심정을 얻어, 안 이후 가히 산수를 말하고, 선생의 지혜와 학문의 깊이를, 안 이후에야 가히 이정자를 칭찬 할수있을 것이다,

물결을 보고 도(道)를 깨닫고, 산을 우러러보고 어진마음을 일으켜서, 내 마음을 넓은 산곡에 비하여 내 몸의 허심(虛心)을 헤아리고,
대에 올라서는 스스로 자기의 차례를 낮춤을 생각한, 다음에야 선생이 즐거워 한 바를, 거의 만분의 일 일지라도 알수 있을 것이다,

 

이 마루에 올라 이 현판을 보고, 가히 스스로 닦을 생각을 하지않고, 감히 선생의 관행에 비 할 손가,

상정이 일찍이 선생의 인품을 풍문으로 듣고 흠모해서 배우고자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거치른 글로, 이름을 그사이에 넣케 되니, 어찌 후학의 영광된 행위라 아니 하리오,

 

정축년(1757년 영조33년)7월16일,
한산 이상정 삼가지음.

출처 : 참 나를 찾아 산사로의 여행
글쓴이 : 木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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