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이 경매 사이트에서 북한과 관련된 물건들을 구경하다
눈에 확 띄는 미인 사진이 담긴 우표가 있어서 구입했다.
처음엔 북한 영화배우인 줄 알았는데 설명을 보니
Teresa Teng 이라는 중국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조금 더 찾아보니
鄧麗君 (등려군 Deng Li Jun) 이라는 중국 가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중국 본토 가수가 아니라
대만에서 태어난 대만 가수라는 것이었다.
“ 북한에서 대만 가수를 우표 인물로 사용하다니…?”
궁금증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다.
1989/5/27 등려군 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를 후원하는
대규모 음악 콘서트에 참가해
중국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노래를 불렀다.
파리 집회에 그 당시 30만 명이 모였다고 하니
가히 그 열기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자…그럼 더 이상하지 않은가?
대만 가수이고,,,
게다가 중국의 민주화 운동을 도와주어
중국에서 입국금지가 내려져 중국본토에서는 평생 콘서트를
한번도 열지 못한 여인이
어떻게 북한 우표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등려군은 1953년 대만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은 중국본토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분들이었다.
어려서 부터 노래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11살 때부터 대만의 오페라 영화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14살 때 첫 음반을 냈다.
대만 뿐 아니라 70~80년대에는 일본, 홍콩, 인도네시아 등
여러 아시안 국가에서도 인기가 매우 높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공항(Airport) 이라는 노래가 대 히트를 치면서
일본어로도 음반을 여러 장 발표했다.
중국본토에서는 등려군의 노래가 금지되었지만
거의 모든국민들이 그녀의 노래를 즐겨 불렀고,
심지어는 관공서에서까지 등의 노래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등의 노래를 도저히 속에 가두어 놓을 수 없게 되자
결국엔 중국정부도 손을들고 금지령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념과 국경을 초월하는 문화와 예술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낮에는 큰 등이 다스리고, 밤에는 작은 등 이 나라를 다스린다” 는
우스갯말이 유행할 정도로 등려군의 인기는 대단 했다고 한다..
(등소평 과 성이 같은이유 …)
여담이지만,
등려군은 70년대 미국 할리우드에 데뷰해 활동 중이던
성룡과 연인 관계였다.
(등려군은 한동안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를 배우는 한편
라스베가스와 링컨센터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성룡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결혼한 임봉교(린펑차오·林鳳嬌) 보다
등려군을 마음속으로 더 사랑했지만 주위의 절친한 친구들이
성격이 너무 조용한 등려군을 싫어하고
사교성이 좋은 임봉교를 좋아하는 바람에 떠밀려서
임봉교와 결혼 했노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자 이제 다시 돌아가서…
천안문 민주시위를 지지하고,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대만 가수가
어떻게 북조선 우표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정치적으로 본다면 이런 외국 여인이,
그것도 사상이 불순한 사람이 우표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북한 실정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유는 단 하나…
김정일의 지시로
등려군 기념 우표가 만들어 졌다고 볼 수밖에 없을듯하다
북한 영화수준을 높인다는 명목아래
남한 영화인 신상옥, 최은희 를 납치해 많은 돈을 투입해
영화를 만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김정일은 음악과 영화를 거의 광적으로 좋아했다는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등려군은
김정일이 매우 좋아했던 가수임에 틀림이 없을 듯 하다.
어쩌면 그녀의 생전에 김정일 초청으로
북한을 비밀리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등려군은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위조여권이 문제가 되어 미국으로 떠났었는데,
위조여권하면 떠오르는 것 역시 북한이다.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도 위조여권으로 인해
일본에서 망신 당하고 쫒겨난 적이 있다.)
등려군은 1995년 봄 태국 치앙마이에서
심한 아스마(천식) 로 인해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온국민에게 사랑받았던 그녀의 장례식은
국장급으로 치루어졌으며
대만총통과 함께 수만 명의 시민이 모여
국민가수 등려군의 마지막길에 눈물을 뿌렸다.
등려군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96년,
북한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PS:
북한의 기념우표들은
뒷면에 침을 바르면 점착성이 생기도록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탈북자 김모(42)씨는
“북한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우표는 따로 있으며
기념우표는 그야말로 수집용 기념우표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의 18번 애창곡
* 이글은 앞에 쓴 <미모의 북한우표 주인공은?> 과 연결된 글입니다.
주성하 기자의 북한 이야기는 대부분 매우 흥미롭지만
작년 초 읽었던 7부작 <김정일의 기쁨조 미향 이야기> 는
그중에서도 백미(白眉)가 아닐까 생각된다.
(혹시 아직 못보셨다면 강추 /nambukstory/22787)
오늘 그 글을 다시한번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주성하 기자의 블로그를 한참 뒤진 끝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일년만에 다시 읽어보니 내용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그런데 글을 읽어 내려가다 제 4편에서 눈이 멈추었다.
” 제 차례가 됐는데, 저는 노래는 영미보다 많이 못해요.
저는 일본 노래 ‘미치즈레’를 불렀어요.
일본어로 부르고 북한에서 번역된 가사도 부르고 했어요.
‘ 미치즈레’ 는 사실 미옥 언니가
장군님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귀띔해줘서 배웠어요.
언니에게 노래 책이 있는데 일본말을 모르니
일본말을 한국어로 적어서 외웠어요”.
물위에 떠서 사는 부평초 보고
이밤도 이내 신세를 말하였더니
이슬 맺힌 눈으로 말없이 날보며
우리 모두 같은 신세라 고개만 끄덕이네
그대는 그대는 나의 길동무라.
水にただよう浮草におなじさだめと指をさす
言葉少なに目をうるませて俺をみつめてうなず
くおまえ きめた きめたおまえとみちづれに
흠… 김정일이 일본 노래 미치즈레 를 제일 좋아했다…?
읽기를 멈추고, 누가 미치즈레를 불렀는가 찾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등려군 이 노래를 부른것이 아닌가 !
1996년 북한에서 발행한 등려군 기념우표를 보면서
김정일이 등려군을 좋아했을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을 했었는데,
오늘 등려군이 부른 “미치즈레” 라는 노래를
김정일이 제일 좋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심장이 조금더 빠르고 크게 콩딱 거림을 느낄수있었다.
– 마치 퍼즐 한조각을 맞추고 기쁨에 들떠있는 어린아이처럼…
대만 여가수 초상이 들어간 북한우표,
위조여권, 김정일이 가장 좋아했다는 미치즈레…
북한에서 발행한 등려군 우표의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는듯한 느낀이 들었다.
이것은 물론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여러 여건을 살펴보았을때
등려군이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사이에 북한을 방분해
김정일 앞에서 공연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미치즈레는
원래는 와타리 테츠야 가 처음 불렀지만,
등려군도 이노래로 음반을 내었을뿐만 아니라
1981년에는 산다화(山茶花 동백꽃) 라는 중국어로
리메이크 할 정도로 이 노래에 애착을 보였다.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김정일도 참 불쌍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북한의 절대권력자이고
전 인민에게 사랑받는 장군으로 보이지만,
실상 김정일은 자신이 바로 부평초 처럼 외로운 사람이라고
느꼈을런지도 모르겠다.
탈북한 미향이라는 여인에 의하면
김정일은 종종 이런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하니…
등려군 – 월량대표아적심
-사막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