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소식

[스크랩] 리설주 포르노 동영상’ 실체

지와이원 2014. 4. 12. 21:07

 

‘리설주 포르노 동영상’ 실체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부인은 ‘리설주’입니다. 은하수관현악단에서 가수로 활동한 리설주는 2009년 김정은과 결혼해 2010년 딸을 출산했습니다. 김정은에게는 내연녀가 있는데 그게 바로 현송월입니다. 김정은은 10대 시절부터 김정일의 기쁨조 파티에 수시로 참석했는데, 당시 보천보 전자악단 가수로 기쁨조 단원이었던 현송월에게 마음이 끌려 그와 연인 관계로 발전합니다.  

 

 

 

김정은과 내연관계로 승승장구한 현송월


현송월에게 마음을 빼앗긴 김정은은 그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줍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 김정은의 비호 아래 <미래가 아름다워> <휘파람 총각> 등의 대표곡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2006년 현송월이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김정은과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긴 김정일이 현송월을 김정은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북한군 장교와 강제 결혼을 시켰고, 더는 가수 활동을 하지 못하게 ‘출연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12월 이후 현송월이 갑자기 등장했고, 지난해 3월8일 현송월은 김정은이 참석한 은하수 음악회에 출연했는데, 한눈에 봐도 만삭의 몸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현송월은 무대에 올라 자신의 대표곡인 <준마처녀(일 잘하는 여성)>를 불렀습니다.

 

 


▼ 최근에 처형당한 현송월..화면 가운데 ▶ 클릭하세요



 

* 북한 '퍼스트레이디' 리설주의 열창


 

이후 현송월은 ‘김정은 악단’으로 불리는 모란봉악단의 단장에 전격 임명됩니다. 김정은은 모란봉악단 공연이 있을 때마다 현송월을 자신과 가까운 곳에 배석시키고, 심지어 지방을 방문할 때도 현송월을 수행시켜 둘 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향후 리설주와 현송월의 갈등 관계가 표출될 수도 있음을 암시해주는 대목입니다.

 

 

 

 

 

현송월 등 9명 체포된 후 3일 만에 총살


그런데 지난 8월17일 현송월이 갑자기 체포됐고, 3일 만에 평양시 교외 강건 군관학교 연병장에서 총살당합니다. 30발이 든 탄창을 낀 기관총 처형을 당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현송월 외에 문경진 은하수관현악단장과 정선영 은하수관현악단 차석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왕재산 예술단원 등 9명이 함께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들의 죄명은 ‘음란물 제작’입니다. 자신의 성관계 장면을 촬영해 판매하고 음란물을 시청한 것이 북한 사정 당국의 감시망에 걸려든 것이 화근이 됐답니다. 실제 은하수관현악단과 왕재산예술단은 8월 초부터 북한의 공식 매체에 등장하지 않고 있어, 해체설이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현송월이 처형되자 그 배경에 ‘리설주’가 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김정은의 내연녀인 “현송월이 뭐가 아쉬워 포르노를 찍었냐”는 것이고, 리설주가 현송월을 눈엣가시로 여겨 총살하도록 함정을 팠을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습니다.

 

아사히 신문 "리설주도 포르노 찍었다"


그런데 9월21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이와 관련해 새로운 의혹을 제기합니다. 북한 고위 간부의 말을 인용해 “인민보안부는 이들을 도청하는 과정에서 ‘리설주도 전에는 우리와 똑같이 놀았다’고 말한 대화 내용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김정은은 리설주와 관련된 추문을 은폐하기 위해 예술단원 9명을 공개처형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게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아사히 신문 계열인 TV아사히는 지난 2009년 6월 ‘김정일 3남 김정운의 사진’이라며 보도했지만, 오보로 판명나자 사과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리설주 포르노 동영상’이 남한 언론에 보도되자 북한도 발끈했는데, 조선중앙통신은 22일 논평을 통해 “감히 우리의 ‘최고존엄’을 모독했다”며 “추호도 용서치 않고 가차없이 징벌할 것”이라고 강력 반발했습니다.

 

 

 

 

우인희 처형도 김정일의 여자였기 때문? 

 


개성 출신인 북한 여배우 우인희는 1960년대 초 <춘향전> 주인공을 맡으면서 하루아침에 은막의 스타가 됐다. 수없는 유혹을 받게 된 그녀는 심심찮게 스캔들을 뿌렸지만, 체코 유학파 인기 영화감독인 유호선과 결혼해 3명의 아이까지 두게 된다.

 

 

결혼 후에도 그녀를 둘러싼 스캔들은 이어졌다. 결국 우인희는 스캔들로 인해 전체 영화인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비판대에 서게 된다.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손가락질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은 나에게 뭐라 뭐라 하며 유혹한 적이 없었느냐”고 폭로하면서 당차게 대응하고 나섰다.

 

영화계에서 방출된 그녀는 2.8영화촬영소의 보일러실 화부로 전락했다. 1년 이상 고생하던 그녀는 영화적 재능을 안타까워한 지인들의 청원에 힘입어 1979년께 배우로 복귀했다. 그녀는 로동당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한 재일교포 청년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80년 겨울 어느 날 두 사람은 청년의 고급 승용차 안에서 히터를 켜놓고 사랑을 나눈 뒤 잠들어버렸다. 결국 청년은 질식사한 채로 발견됐고, 우인희는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다가 2주 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영화촬영소와 배우들에게 집합령이 내려진다. 버스를 타고 교외의 한 장소로 나간 배우와 영화제작자들은 “우인희는 부화방탕죄를 범했으므로 인민의 이름으로 총살형에 처한다”는 방송을 들었다.

 

그리고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납북됐을 당시 평양에서 이 이야기를 접했다는 영화배우 최은희씨는 “우인희 이야기를 처음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며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김정일의 얼굴이었다”고 말했다. 김정일 이외에는 아무도 당에서 그토록 끔찍이 아꼈던 인민배우를 처형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설명이다. 우인희 또한 김정일의 여자였을 것이란 얘기다.

 

출처 :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환경운동본부
글쓴이 : 유공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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