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사진

[스크랩] 고향 영주의 옛모습

지와이원 2011. 5. 5. 14:45

아주 옛날 어렸을 때, 구성공원 앞에 강물이 흐르고, 오른 쪽 위에 가학루가 보인다.

대여섯살 경에 이 강물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 앨범 어디엔가 있을텐데...

 

초등학교 입학전이었던가 어느 가을 추석이 임박했는데 수해가 나서....

 

 

 수해가 난후 관사골로 이시 갔다가 초등하교때 휴천리 철둑가로 이사 왔었다.

 

영주초등학교운동장과 군청 그리고 철탄산 

 

나 어릴적 그대로인 영주역

 

 

 

공설운동장, 생사공장 그리고 서천교 

 

 

 

 

 

 

 

 

 

 

 

 

 

 

 

부석사의 옛모습

 

이때가 언제인가 죽령고개의 주막이라고 하네

 

 

 지금의 구성공원 가학루

 

소백산 죽령 넘어 영주땅



한때는 신라와 고구려와 국경이 되기도 했던 죽령은
고려와 조선조 시대 때 청운의 꿈을 안은 선비들의 과거길이었고,
온갖 문물을 나르던 보부상들과 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주땅에 가려면 죽령을 넘어야 한다. 아흔 아홉 구비에 구름도 쉬고 넘어야 한다는 소백산 허리에 있는 죽령에 이르자 더위에 지친 나그네의 숨은 턱 막히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백산의 장엄한 산세가 시야를 막고 있고 만만해 보여야 하는 고갯길조차 까마득하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절양장(九折羊腸)같은 산길 때문에 멀미라도 날 것 같은 곡예운전을 하며 죽령에 이르자 앞뒤로 툭 트인 발아래 풍경은 시원하다. 뒤돌아 올라온 길을 보자 단양땅이 어서 내려가라는 듯 손짓을 하고 있고 영남 쪽의 영주땅은 지금까지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주려는 듯 시원스레 열려 있었다.

기호지방과 영남지방이 맞닿은 곳에 있는 이 고개는 동국여지승람에 적혀있는 내용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 5년 서기 158년에 신라사람 죽죽(竹竹)이 길을 개설하였다하여 죽령이라 불리어 왔다. 한때는 신라와 고구려와 국경이 되기도 했던 죽령은 고려와 조선조 시대 때 청운의 꿈을 안은 선비들의 과거길이었고, 온갖 문물을 나르던 보부상들과 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고개 아래에는 이 나라 안에서 길이로는 두세째를 다투는 4.5km의 죽령터널이 중앙선 철도를 담고 있다.

죽령 정상에 오르면 목마른 나그네들이 쉬어 갈 수 있는 휴게소와 예스런 모습을 간직한 주막집이 있다. 그리고 '영남관문죽령'이라는 돌에 새긴 이정표가 영남땅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고 있다.

죽령을 넘어 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장승 대여섯 쌍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 이 길을 개척한 죽죽을 기리던 죽죽사 터와 봉화둑이 풀숲에 가려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소백산을 왼편에 두고 조심스레 산길을 내려오면 바로 인삼과 사과로 유명한 풍기땅이다.

소수서원

풍기에서 915호 지방도를 따라 순흥면으로 올라가면 고려시대부터 흥성했던 역사가 많은 고을답게 유물과 유적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빛나는 곳이 소수서원이다.

풍기 출신으로 고려 때의 유명한 유학자인 안향 선생을 기리기 위해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이 서원의 원래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었다. 그러나 1549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지낼 때 명종 임금이 친히 쓴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으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다.

사액서원은 임금이 책이나 논밭, 노비를 내려보내고 면세와 면역의 특전까지 주는 서원을 말한다.

소수 서원은 이 나라 안에서 세워진 서원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서원으로도 유명하다.

몇 년전 군에서 비용을 들여 단장을 한 소수 서원은 수백년 된 소나무 숲 속에 숨어 있다. 송진 향기가 짙은 송림 사이로 난 길을 걸어 들어가면 보물 59호로 지정되어 있는 당간 지주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절 입구에 패불을 거는 기둥 받침인 당간지주가 서원에 있다는 이유는 이 서원터가 원래 절터였기 때문이다.

소수 서원이 들어서기 전에는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받들던 조선시대의 '억불숭유'의 정책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절터가 서원터로 바뀌는 일이 흔했다고 하는데 소수 서원도 숙수사 터에 세워져 있다.

당간 지주를 지나면 제법 물이 많은 개울이 있고 그 건너편에 운치 있는 정자인 취한정이 있다. 서원 쪽으로도 경염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서원 대문을 들어서면 예전에 강당으로 쓰였던 건물과 서고로 쓰였던 건물을 볼 수 있고 그 왼편에 문성공묘가 있다.

서원 뒤편에는 국보인 안양선생 영정과 보물 485호인 원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의 제자상, 주세붕의 영정 등을 복사해서 전시하고 있는 유물 기념관이 있어 둘러 볼만하다.

봉황산 부석사

소수서원에서 10Km 정도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부석사에 이른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이 있어 유명한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에 화엄종의 본산으로 의상대사가 세웠다. 창건한 삼백년 지 한 삼백년만에 불타 없어졌고, 1041년 고려 정종 7년에 중건했다.

무량수전은 흔히 복잡해 보이기 쉬운 조선시대의 불교 건축물과는 달리 모양이 우아하게 단조로운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친다. 부석사에는 국보 18호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국보 17호인 석등, 국보 19호이고 역시 고려 때 건물인 조사당, 국보 45호인 조사당 벽화와 보물로 지정된 여래 돌좌상, 삼층석탑, 당간 지주와 같은 많은 문화재가 있어 근래에 유행하는 で문화유적 답사 여행と을 알차게 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무량수전은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건축학도들은 반드시 한 번 들러 봐야햐 할 정도로 건축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다. 최근에는 모 정유회사에서 외국 기업에 CI작업을 의뢰했을 때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면서 무량수전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부석사에도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이 절을 창건한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병을 앓았을 때 도와주었던 선묘라는 중국 관리의 딸이 의상을 흠모해 불제자가 되어 의상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의상이 이를 막았다. 그후 의상이 구도생활을 끝내고 귀국하는 길에 선묘의 집을 찾았으나 없자 그대로 귀국했고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큰 용이 되어 의상의 뱃길을 보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의상이 절터를 발견했으나 이교도가 물러가지 않자 집채같은 바위를 세번이나 공중에 뜨게 하는 조화를 부려 의상으로 하여금 이교도를 물리치고 절을 지을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선묘용은 돌이 되어 법당 자리에 잠들었다고 한다. 용이 변한 것이라는 돌은 집채만한데 의상이 그 위에 무량수전을 짓기 전에 돌이 하늘에 떠올랐다고 하여 이 절의 이름을 부석사라고 했다.

부석사를 창건할 때 만들었다고 하는 석등은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에 든다. 이 석등을 백번만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있어 부석사에 온 신도들이 그 둘레를 돌기도 한다. 또 사월 초파일이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달밤에 이 석등을 돌며 복을 빈다.

무량수전 동쪽 30m 떨어진 곳에는 신라통일 기념탑이 있다. 부석사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탑은 삼층으로 비록 손상이 되어 있지만 국보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출처 : thawn(정태환)
글쓴이 : thaw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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