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례역사

[스크랩] 대원군이 절에 불지른 이유는?

지와이원 2012. 4. 22. 19:33

먹는 여행, 구경하는 여행, 체험하는 여행 기타 등등. 세상에는 별의 별 여행이 다 있다. 신문, 방송, 인터넷에는 여행정보가 흘러넘친다. 그럼 이런 여행은 어떨까. 우리의 유전자 속에 기록돼 있는 우리 역사와 문화 흔적을 찾아가기! 먹을 것 아끼고 재미난 볼 것들에게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마음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숨어 있는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희열을 찾아가보자. 자, 조선닷컴이 시작하는 ‘지 멋대로 역사 순례’ 그 첫 번째, “대원군이 사찰(寺刹) 방화범이 된 이유는?”

조선 말기 권력의 상징, 남연군묘(南延君墓)

온천으로 유명한 충남 예산군 덕산면 한 야산에 절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가야사(伽耶寺). 명종7년(1177년) 천민 망이와 망소이가 난을 일으켰을 때, 난민들에게 절이 함락된 적도 있었지만, 이후에는 금탑(金塔)이 있을 정도로 흥성했던 절이었다. 아래에 이야기할 수덕사보다 더 컸다고 한다. 이 가야사가 자리한 땅이 명당이라는 사실이 비극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헌종 10년(1844년), 조선왕실의 친족이자 야심가였던 이하응이 느닷없이 이 절에 불을 질렀다. 후안무치한 범죄행위였지만, 왕족이다 보니 승려들은 울분 가득 안고서 절을 떠났다. 불이 나던 순간, 그 참상을 차마 볼 수가 없던 산 속 미륵석불은 무거운 몸을 돌려버렸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182호로 지정돼 있는 이 미륵불은 지금도 절의 반대방향, 그러니까 북쪽 산봉우리를 향해 서 있다. 도대체 이하응은 왜 방화범이 되었는가.

이하응이 선친 남연군의 묘를 옮길 방도를 찾고 있을 때였다. 왕족으로 살기를 만족하지 않던 그는 왕 자체를 꿈꿨다. 그래,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면 조상의 음덕을 바라는 거라구! 그가 만난 한 지관 정만화가 그에게 물었다.

“자자손손 복을 누리길 바라시오, 아니면 자손 2대까지 황제가 나오기를 바라시오.”
“2대까지 황제가 되게 해주시오.”

그런데 지관이 점지해준 그 명당엔 벌써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그곳이 바로 예산 가야사 대웅전 앞 석탑 자리였다. 황제가 되겠다는데, 고깟 절이 대수랴. 숭유억불 정책으로 초지일관한 조선의 왕족 이하응은 냉큼 사람을 시켜 자신의 총감독 하에 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니 그게 1844년이다. 그리고 19년 뒤, 이하응의 아들이 왕이 됐다. 고종(高宗)이다. 그리고 1907년 이하응이 손자가 조선의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 2대 황제에 올랐으니 그가 순종(純宗)이다.

2대까지 황제가 되었으니 지관의 말은 맞았다. 그런데 황제 2대로 나라까지 망해버렸으니, 그 지관이 말을 아낀 것인가 아니면 거기까지는 몰랐던 것인가.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아들이 왕이 되고도 8년 뒤에야 가야사 승려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근처에 절을 만들어 주었으니, 지금도 남아 있는 보덕사다.

남연군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도립공원 안에 있다. 가뭄에 물 줄어든 옥계저수지를 지나 시원하게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15분 정도 걸어 오르면 오른편으로 남연군묘가 보인다. 작은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얕은 야산인 묫자리를 360도 산줄기가 에워싸고 그 사이에는 너른 들판이 출렁인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오, 하고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 풍광이 수려하다.

커다란 분묘 앞으로 각종 석물들이 서 있고 오른편에는 비석이 서 있다. 아들 이하응이 직접 쓴 비문이다. 분묘가 있는 바로 그 자리가 가야사 석탑이 있던 자리다. 잔디밭에는 개망초와 쑥부쟁이들이 바람에 날린다. 자손의 발복을 위해 방화의 범죄를 저지른 아비의 탐욕도 간 곳 없고, 불구덩이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승려들의 모습도 간 곳 없다. 어허, 어허!

너무도 화려한, 수덕사

남연군묘에서 나와 덕산온천을 스치며 수덕사로 간다. 말이 필요없는 절이다. 국보 49호인 대웅전을 비롯해 ‘볼 것’ 천지인 백제시대 절이다. 감히 말하건대, 수덕사에서는 그 대웅전의 아름다움에 취한 다음에 조용히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반면교사’로서의 수덕사를 이야기하자면-

1.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솔길을 육중한 성보박물관 건물이 잘라버린 점. 문틈으로 조금씩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절집 구조를 완전히 두토막 내버렸다.

2.기업도 아닌데, 온갖 보도자료와 복사한 신문을 걸어놓고 ‘나 근사하다’라고 소리치고 있는 점. 대웅전 앞마당 오른쪽 법고각은 수덕사 기사를 실은 신문을 복사해 도배를 해놨고 왼쪽에 있는 요사채에는 ‘黙言(묵언)’이라고 적어놓았다. 이 무슨 말인가. 닫을 입 따로 있고 열 입 따로 있으니까 닥치라는 소리다.
옛날에 풍수학을 공부하던 서울대 최창조 교수가 풍수를 비난해대는 교단이 지긋지긋해 때려치웠다. 그러자 전화가 왔다. 묘자리를 봐달라는. 그래서 ‘당신이 어떻게 묘자리를!’ 했더니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더라는 것이다. 뭐가 다른가.

결국 나라를 무너뜨린 대원군의 권력욕, 중생에게 묵언을 가르치되 정작 스스로 큰소리로 소리쳐대는 절. 반드시 비교해 볼 일이다. 그래서 수덕사를 꼭 가봐야 한다. 대웅전을 보고, 큰 소리를 듣고. 단, 대웅전은 몇바퀴건 찬찬히 돌면서 뜯어보시길 권한다. 맞배지붕의 위풍당당과 목재의 자연스러움, 관광객의 낙서를 지우지 않고 뒀다가 나중에 칠을 하며 한꺼번에 덮어버리는 여유까지 대웅전은 소유하고 있다.

문향을 듣다, 추사고택

남연군묘와 수덕사에서 소매에 묻혀왔던 권력과 부귀영화의 냄새는 추사 고택에서 훨훨 털어버린다. 추사 고택.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덕산에서 45번 국도를 타고 삽교쪽으로 간 뒤 역탑리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15분 정도 가면 나온다. 추사가 누구인가.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였다. 왕족의 인척. 그러니까 권력으로부터 애시당초 배제된 집안이다. 권력을 잡고 싶어도 권문세가의 견제로 그리 되지 않는다. 김정희는 그 견제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어릴 적부터 재능을 보였지만 벼슬에 오른 뒤 당쟁에 휩쓸려 결국 제주도와 함경도로 유배를 당한다.

그 불우한 말년에 그는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그 유명한 세한도도 제주도 유배시절에 탄생했다. 추사체로 이름난 그의 글씨도 유배시절에 완성됐다. 유배에서 돌아와 그는 선친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의 한 절에서 살다가 71세에 죽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무덤은 그가 태어난 집 바로 옆 언덕에 있다. 자, 그 집이다.

보라, 200년이 채 안된 시대에 추사가 이 공간을 거닐며 사랑을 했고 학문을 했고 화장실을 갔고 잠을 잤다. 사랑채부터 안채에 이르기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주련들은 모두 그의글씨다. 방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이 걸려 있다. 진품! 그 주련들과 작품들의 글귀만 읽어도 큰 공부를 하게 된다.

적혀 있기를 ‘세상에서 가장 큰 일 두가지는 농사와 독서라’ ‘천하의 최고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자라’ ‘가장 맛있는 요리는 두부와 푸성귀’ ‘가장 귀한 만남은 아내와 아이들을 보는 것’... 가장 단순하여 가장 귀한 말들이 아닌가. 교과서와 사진에서 보는 감흥과 그가 살아 숨쉬던 공간에서 대면접촉하며 느끼는 흥분은 비교할 수가 없다.

고택 오른쪽으로 증조부 김한신의 묘가 있다. 아내 화순옹주와 합장한 묘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이다. 왕의 부마로 월성군이 된 김한신이 나이 서른 여덟에 요절하매, 화순옹주가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에 아버지 영조가 만려하였으나 끝끝내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옹주는 남편과 함께 묻혔고, 영조는 이를 서러워하며 비문을 어필로 내려보냈다.

그 옆에는 화순옹주 정려문이 있다. 정려문은 일종의 열녀문이다. 영조는 조정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자기 딸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만류를 듣지 않는 미운 딸이 아닌가. 결국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가 정려문을 내렸다. 화순옹주는 조선시대 유일한 왕족 열녀로 기록됐다.

또 그 옆에는 아담한 조각공원 ‘백송공원’이 있다. 몸통이 하얀 비늘로 덮여 있는 백송을 모티브로 한 공원이다. 추사의 글씨와 그림을 빌려 만든 여러 조각들이 전시돼 있다. 왜 백송일까.

그 옆 300미터를 더 가면 추사의 고조부 묘가 있다. 묘역 초입에 하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나무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정확하게 기록돼 있는 흔치 않는 경우다. 조경을 맡은 이는 바로 젊은 김정희였으니까.

1811년, 25세 때 추사는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를 다녀왔다. 지금의 북경인 연경에서 백송 씨앗을 몇 톨 선물 받아 돌아왔다. 그 씨들을 고조부 묘 앞에 심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싹을 틔워 오늘까지 살아남게 되었다. 수령도 정확하게 199살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이렇듯 현대와 직결돼 있는 가까운 과거이기에 추사 고택의 순례자들은 묘한 흥분을 느낀다. 박제된 교과서가 아니라 눈 앞에서 살아 숨쉬는 역사를 대면하게 되니까 말이다. 길을 돌려 고택 옆에 숨어 있는 화암사로 가보라. 불교에 심취한 추사는 화암사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제주도로 유배당한 뒤에도 수시로 편지를 보내 화암사를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평화, 안식 그리고 안국사지

자, 권력의 냄새가 가셨는지. 이번에는 소매에 담긴 문향을 가득 머금고 안국사지로 간다. 조금 멀지만 서해안고속도로를 향한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가보자. 화암사에서 나와 우회전한 뒤 618도로로 고덕면-619도로로 면천면-70번도로로 운산 방향으로 간 뒤 서해안고속도로를 지하통로로 횡단하면 ‘안국사지’ 이정표가 나타난다. 길눈이 여간 밝지 않으면 찾기 쉽지 않지만, 일단 찾아 들어가면 비밀의 정원을 만나게 된다.

절터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안국사지 언덕에 삼존불 입상과 석탑이 서 있다. 그 고즈넉함과 고요함에, 나그네의 숨결도 차분해진다.

익신 미륵사지 미륵불처럼 가분수의 부처 3존이 웃음으로 맞이한다. 전형적인 소박한 백제의 미소다. 아니, 오른쪽 협시불은 머리가 달아나고 없으니, 이 부처님의 미소를 느낄 수 있다면 이를 염화미소라고 할까. 한마디로 기분이 썩 좋은 부처님들이다.

그 앞에 4층석탑이 서 있다. 하늘로 확 휘어진 처마를 가진 석탑이다. 기단에는 부처님들을 조각해놨는데, 그 고졸한 아름다움이 사람을 웃게 만든다. 참선에 열중인 한 부처님은 그 연화좌가 너무도 작게 묘사돼 있어 공중부양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석탑, 삼존 석불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아까 추사 고택에서 느꼈던 무욕(無慾)한 선비의 풍미가 다시 살아난다. 허공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부처들과 천개의 마음을 가진 석탑. 거기에 당신의 마음을 던져놓고 눈을 감아보시라.

조선의 양대 이념 축은 유학과 불교였다. 중기까지 유학자들은 불교를 배척하고 중을 업신여기고 살았다. 절을 빼앗고 불태우고 하는 권력자들의 허망한 과시는 그릇된 것이었음이 남연군묘에서 입증됐다. 중엽 이후 선비들은 불교에 심취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추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안국사에서, 그 평온무사한 경지를 느껴본다. 여기까지, 충남 예산에서 당진에 이르는 조선말기 유-불 순례코스 끝.

<여행수첩>
1.순례 코스:남연군묘-수덕사-추사고택-화암사-안국사지
2.가는길(서울 기준):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32번국도 홍성, 덕산방면-덕산온천(여기에 숙소를 잡고 쉬거나 아니면 당일코스로는 바로 출발)-덕산면에서 이정표 따라 남연군묘-길을 돌려 덕산온천을 지나 수덕사-길 돌려 덕산에서 45번 국도를 타고 삽교쪽으로 간 뒤 역탑리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15분 가면 추사 고택. 화암사는 고택 가는 길목에 있지만 반드시 고택부터 들를 것-화암사에서 나와 우회전한 뒤 618도로로 고덕면-619도로로 면천면-70번도로로 운산 방향으로 간 뒤 서해안고속도로를 지하통로로 횡단하면 ‘안국사지’ 이정표. 길이 쉽지는 않다.
3.먹을 곳:수덕사 앞 사하촌에 각종 먹거리 풍부하다.
4.묵을 곳:덕산온천지구 T모텔 추천. 인터넷과 룸 씨어터 완비. 인테리어도 꽤 세련됐다. 온천수가 객실에 공급된다. * 덕산온천지구에서 숙소를 고를 때에는 반드시 온천수 공급여부 확인할 것. 증명서가 프론트에 붙어 있다. www.tmotel.co.kr, (041)338-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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