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례역사

[스크랩] 혜경궁 홍씨의 읍혈록(한중록)

지와이원 2014. 6. 19. 16:27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쳔고 업는 변이라. 선왕(先王)이 병신 초의 영묘(英廟)긔 상쇼하오셔, 졍원일긔(政院日記)를 업시하야지라 하야, 그 문적(文蹟)을 업시하여시니, 선왕의 효사(孝思)로 그 때 일을 듕인(衆人)이 아니 보리 업시 셜만(褻慢)니 보는 거슬 설워하시미라.

 

<중략>

 

 

그날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하오시니, 그 때 오정 즈음이나 되는데, 홀연 까치가 수를 모르게 경춘전을 에워싸고 우니, 그는 어인 징조런고? 고이하여, 그 때 세손이 환경전에 겨오신지라, 내 마음이 황황한 중, 세손 몸이 어찌 될 줄 몰라 그리 나려가 세손다려 아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 천만 당부하고 아모리(어찌) 할 줄을 모르더니, 그리할 제, 소조(小朝)에서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재촉하오시기 가 뵈오니, 그 장하신 기운과 부호하신 언사도 아니 겨오시고, 고개를 숙여 침사상량(沈思商量)(한 곳에 정신을 몰두함)하야 벽에 의지하야 앉아 겨오신데, 안색을 나오사(바꾸시어) 혈기 감하오시고 나를 보오시니, 응당 화증(화를 내는 증세)을 내오셔 오작지(심상지) 아니하실 듯, 내 명이 그날 마치일 줄 스스로 염려하야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더니, 사기(辭氣) 생각과 다르오셔(평소 생각하던 바와 다르시어) 날다려 하시대,

"아마도 고이하니, 자네는 좋이 살겠네. 그 뜻들이 무서외" 하시기, 내 눈물을 드리워 말없이 허황하야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휘령전으로 오시고 소조를 부르오시다 하니, 이상할 손 어이 피(避)차
(피하자), 돌아나자(달아나자) 말도 아니하시고, 좌우를 치도(물리치지도) 아니 하시고, 조금도 화증 내신 기색 없이 썩 용포를 달라 하야 입으시며 하시되, "내가 학질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의 휘항을 가져오라."하시거늘, 내가 그 휘항은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시고저 하야, 내인다려, 당신 휘항을 가져오라 하니, 몽매밖에(대뜸, 느닷없이) 썩 하시기를,

"자네가 아뭏거나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다리고 오래 살랴하기, 내가 오날 나가 죽게 하얏기 사외로와(마음이 꺼림직하여) 세손의 휘항을 아니 쓰이랴 하는 심술(아니 쓰도록 하려는) 심술을 알게 하얏다네." 하시니, 내 마음은 당신이 그 날 그 지경에 이르실 줄 모르고 이 끝이 어찌 될꼬? 사람이 다 죽을 일이요, 우리의 모자의 목숨이 어떠할런고? 아모라타 없었지(우리 모자의 목숨은 아무 일도 없었지). 천만 의외에 말씀을 하시니, 내 더욱 설워 다시 세손 휘항을 갖다 드리며,
"그 말씀이 하 마음의 없는 말이시니, 이를 쓰소서."하니
"슬희
(싫네), 사외하는 것을(죽을 사람이 세손의 휘항을 쓰는 것을 꺼림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써 무엇할꼬?"

하시니 이런 말씀이 어이 병환든 이 같으시며, 어이 공순히 나가랴 하시던고? 다 하늘이니, 원통이요, 다 그러할 제 날이 늦고 재촉하여 나가시니, 대조(大朝)께서 휘녕전(徽寧殿)에 좌(坐)하시고 칼을 안으시고 두드리오시며 그 처분(處分)을 하시게 되니, 차마차마 망극(罔極)하니 이 경상(景狀)을 차마 기록(記錄)하리오. 섧고 섧도다.
  나가시며 대조께서서 엄노(嚴怒)하오신 성음(聲音)이 들리오니, 휘녕전이 덕성합(德成閤)과 멀지 아니하니 담 밑에 사람을 보내어 보니, 벌써 용포(龍袍)를 벗고 엎디어 계시더라 하니, 대처분(大處分)이 오신 줄 알고 천지 망극(天地罔極)하여 흉장(胸腸)이 붕열(崩裂)하는지라. 게 있어 부질없어 세손(世孫) 계신 델 와서 서로 붙들고 어찌할 줄 모르더니, 신시 전후(申時前後) 즈음에 내관(內官)이 들어와 밧소주방(燒廚房)(대궐 안에 음식을 만드는 곳) 쌀 담는 궤를 내라 한다 하니, 어찐 말인고 황황(遑遑)하여 내지 못하고, 세손궁(世孫宮)이 망극한 거조(擧措) 있는 줄 알고 문정(門庭) 전(前)에 들어가,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하니 대조께서 "나가라." 엄히 하시니, 나와 왕자(王子) 재실(齋室)에 앉아 계시더니, 내 그 때 정경(情景)이야 천지 고금간(天地古今間)하고 일월(日月)이 회색(晦塞)(깜깜하게 막히니)하니, 내 어찌 일시나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으리오. 칼을 들어 명(命)을 그츠려 하니 방인(傍人)의 앗음을 인(因)하여 뜻같이 못하고, 다시 죽고자 하되 촌철(寸鐵)(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나 무기)이 없으니 못 하고, 숭문당(崇文堂)으로 말미암아 휘녕전(徽寧殿) 나가는 건복문(建福門)이라 하는 문 밑으로 가니, 아무것도 뵈지 아니하고 다만 대조께서 칼 두드리시는 소리와 소조(小朝)께서,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하시는 소리가 들리니, 간장(肝腸)이 촌촌(寸寸)이 끊어지고 앞이 막히니 가슴을 두드려 한들 어찌하리오.
  당신 용력(勇力)과 장기(壯氣)로 궤에 들라 하신들 아무쪼록 아니 드시지,

 어이 필경(畢境) 들어가시던고, 처음엔 뛰어나오려 하옵시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地境)에 미치오시니 하늘이 어찌 이대도록 하신고. 만고(萬古)에 없는 설움뿐이며, 내 문 밑에서 호곡(號哭)하되 응(應)하심이 아니 계신지라.
  소조가 벌써 폐위(廢位)하여 계시니 그 처자(妻子)가 안연(晏然)히 대궐(大闕) 있기 황송(惶悚)하옵고, 세손을 밖에 그저 두어서는 어떠할꼬 차마 두렵고 소마소마하여 그문에 앉아 대조에 상서(上書)하여
  "처분이 이러하오시니 죄인(罪人)의 처자가 안연히 대궐 있기 황송(惶悚)하옵고, 세손을 오래 밖에 두옵기 가중(加重)한 몸이 두렵사오니 이제 본집으로 나가와지라." 하고,
  "천은(天恩)으로 세손을 보존(保存)하여지라."
써 가까스로 내관(內官)을 찾아들이라 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선형(先兄)이 들어오셔.
  "폐위 서인(廢位庶人)하여 계시니 대궐 있지 못할 것이니, 본집으로 나가라 하오시니 가마를 들여오니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나가시오리이다."
하시니 서로 붙들어 망극 통곡(罔極痛哭)하고, 업히어 청휘문(淸輝門)으로서 저승전(儲承殿) 차비(差備)에 가마를 놓고, 윤 상궁이란 나인이 안 타고, 별감(別監)이 가마를 매고 허다(許多) 상하(上下) 나인이 다 뒤를 따라 쫓으며 통곡(慟哭)하니, 만고 천지간에 이런 경상이 어디 있으리오. 나는 가마에 들 제 막혀 인사를 도르더니,윤 상궁(尹尙宮)이 주물러 겨우 명(命)이 붙었으나 오죽하리오.
  집으로 나와 나는 건넌방에 누이고, 세손은 내 중부(仲父)와 선형(先兄)이 모셔 나오고, 세손 빈궁(嬪宮)은 그 집에서 가마를 가져와 청연(淸衍)과 한데 들려 나오니 그 경색(景色)망극함이 차마 어찌 살리오. 자처(自處)하려 하다가 못 하고 일이 하릴 없으니, 돌아 생각하니 십일 세 세손

에게 첩첩(疊疊)한 지통(至痛)을 끼치지 못하고, 내 없으면 세손 성취(成就)함을 어찌하리오. 참고 참아 완명(頑命)을 보전(保全)하고 하늘만 부르짖으니, 만고(萬古)에 나 같은 완명이 어디 있으리오.
  세손을 집에 와 서로 만나니, 충년(庶年)에 놀라고 망극한 경상을 보시고 그 서러운 마음이 어떠하리오. 놀라 병(病)날까 내 망극함을 서리담아,
  "망극망극(罔極罔極)하나 다 하늘이시니, 네가 몸을 평안(平安)히 하고 착하여야 나라가 태평(太平)하고 성은(聖恩)을 갚사올 것이니 설움 중이나 네 마음을 상(傷)해오지 말라."
하고, 선친(先親)께서는 궐내(闕內) 떠나지 못하시고, 선형(先兄)도 벼슬에 매이어 왕래(往來)하시니, 세손 모시옵고 있을 이가 중숙(仲叔) 두 외삼촌(外三寸)이니 주야(晝夜)로 모셔 보호(保護)하고, 내 계제(季弟)는 아시(兒時)부터 들어와 세손을 모시옵고 노던지라, 그 아이가 작은 사랑에 모시고 자고 있어 팔구 일(八九日)을 지내니, 김 판서(金判書) 시묵(時默)과 그 자제(子弟) 김기대(金基大)도 와 뵈옵는다 하여, 내 집이 좁고 세손궁(世孫宮) 상하 나인이 전수히 나왔는지라, 남장(南墻) 밖 교리(敎理) 이경옥(李敬玉)의 집을 빌려 김 판서 댁(金判書宅)이 그 며느리를 데리고 와 빈궁을 모시고 있게 하니 담을 트고 왕래(往來)하니라.
 

혜경궁 홍씨가 태어날 즈음 오랜 근심 끝에 영조는 세자를 얻는다. 영조는 동궁의 주인이 생긴 것을 기뻐하여 세자가 태어난 지 백일 만에 동궁전으로 보낸다. 선왕조의 대인으로 위세가 등등했던 동궁 나인들이 영빈 이씨(세자의 생모)를 업신여기자 영조는 동궁을 점점 피하게 되었다. 또한 영조가 사랑했던 화평 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영조는 비탄에 빠져 세자에게 무관심하게 되고, 그 사이에 세자는 무술과 사랑놀음을 즐기게 되낟.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많은 이들이 있는 곳에서 꾸중을 하고 세자를 미워한다. 부왕이 점점 무서워진 세자는 불안함과 신경증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세자는 땅속을 파서 밀집을 만든 후 그 곳에서 기거하게 되는데, 이 사실을 나경언이 영조께 고해 바쳐 영조의 화가 극에 달한다. 세자를 폐위하고 죽이기로 결심한 영조는 세자를 마당으로 내쫓은 후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다. 시간이 지나 정조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선친과 모친에게 지극한 효성을 보인다.

▶갈래: 궁중 수필

▶성격 : 회상적, 애상적, 서사적

▶제재 : 사도 세자의 참변과 자신의 기구한 운명

▶의의 :

① 내간체 문학의 백미
② 전아한 궁중 용어 사용
③ 절절하고 간곡한 묘사
▶주제 : 임오화변을 중심으로 한 작자의 기구한 궁중 생활 애환(哀歡)


<한중록>은 조선조 후기 정조의 생모이고 사도세자의 빈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자서전적인 회고록이다. <한중만록>이라고도 하며 한문으로 된 것 중에는 읍혈록(泣血錄)이라는 것도 있다. <한중록>은 6권 6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권에 걸친 통일적이고 계통적인 내용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때 그때의 궁중과 친정의 사건들을 기록한 수필과도 같은 것이었다.
저자가 회갑을 맞던 1795년(정조 19년)에 친정 조카인 홍수영의 소청으로 이 글을 썼다고 전한다. 그후 67세, 68세, 71세 등 네 번에 걸쳐 쓴 네 편의 글이 있다. 첫 번째 회갑때 쓴 것은 비교적 한가로운 심정으로 붓을 든 것이고 나머지 3편은 모두가 아들인 정조가 승하한 직후부터 붓을 일으켜 어린 왕 순조에게 보이기 위해 쓴 것으로 비교적 정치적 색체가 농후한 작품이라 하겠다.
<한중록>의 주된 목적은 임오화변의 생생한 목격자의 입장에서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 장차 순조에게 억울하게 모함을 받은 친정의 한을 설원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억울하고 처절한 원망의 정을 나타낸 주정적인 작품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흔히 감정에 치우치기 쉬우나 혜경궁 홍씨의 인품이 사사로운 감정을 되도록 억제하고 지적이고 냉철한 안목에서 사건의 진상을 바르게 밝히고 있다. 이는 손자인 순조에게 정도를 알리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한중록의 역사적 배경
영조 당시 세력을 쥐고 있던 노론은 사도 세자를 중심으로 새 새력을 구축, 소론을 물리치고자 했으나 세자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노론은 온갖 음모를 꾸며 세자를 못살게 굴었고, 급기야는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誣告)하여 부자간의 사이를 갈라 놓았다. 이에 분노가 극에 이른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고, 군관을 시켜 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하였다. 세자는 9일 간을 신음하다가 결국 그 속에서 굶어 죽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없애려고 했으나, 오히려 자기 아들을 그 희생물로 만들었다. 혜경궁 홍씨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이 참변을 목격하였으나 은인자중하여, 아들 정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출처 : magaret
글쓴이 : magaret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