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빠빠이 이상용 남을 돕고 쓴 누명

지와이원 2012. 8. 16. 10:58

나는 열한 살 때부터 아령을 잡고 운동을 했다.
7년 뒤 대전고 재학시절에 미스터 충남에 선발됐다. 
그 후 고려대에 입학해서는 역도부에 들어가 미스터 고대에 뽑혔다. 
졸업 후 7년간 외판원으로 전전하다가 
TV에 출연해 건강의 상징인 뽀빠이가 되었다.
정말 신물나게 고생하면서 산 기간이었다.
 
1970년대 중반 KBS TV < 모이자 노래하자 > 로
나는 어린이들의 우상이 됐다. 
그 시절 심장병에 걸린 한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찾아왔다.
수술비가 없다기에 함께 서울대병원에 갔다. 
수술비가 1800만원이라는 말에 기절할 뻔했다. 
당시 열 평짜리 아파트 값이 1110만원이었고
나는 사당동 독채 전세 650만원에 살고 있었다. 
내 나이 30대 초반 때다.
"기술이 없어 못한다면 할 수 없으나 
돈이 없어 죽는다면 안된다. 
수술하쇼!"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 길로 명동에 있는 야간업소 사장을 찾아가 사정했다. 
결국 세 업소의 진행자로 출연하기로 하고
석 달치 봉급을 선불로 받아 수술비를 댔다. 
나는 차 없이 야간에 이 술집 저 술집을 동분서주해야 했다. 
"집도 없는 주제에 남의 자식 수술해준다고 
집세의 세 배나 되는 돈을?
미쳤어!" 
그런데 얼마 후 심장병 수술을 한 어린이의 아버지가 방송에서
뽀빠이가 무료로 수술을 해줬다고 밝히면서 
우리 집에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가 수술을 해달라며 모여들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 그들을 설득해
한국어린이보호회를 만들어 한 명씩 수술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켜 1987년 국민훈장 동백상, 가톨릭봉사대상 등을 탔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국회의원에 나올 거라고 했다.
난 하나님과 약속했다. 
"정치 근처에도 안 가겠다"고.
 
1996년 11월3일은 나에게 6·25전쟁과 같은 날이다. 
< 우정의 무대 > 화천 녹화가 끝나고 돌아오니
언론에 내가 아주 죽일 놈으로 보도되어 있었다. 
"심장병 어린이 수술 기금 횡령 혐의를 받고 있으며,
벤츠600을 타고 다니고, 40억원짜리 집에 살고,
심장병 어린이를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다"는 기사였다. 
너무나 억울했지만 나를 모함한 자가 
언론을 쥐락 펴락하고 있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죽고 싶었다.
난 20년간 지프차를 타고 다니고
지금 살고 있는 40평짜리 빌라의 융자금은 
작년에야 상환이 끝났다. 
그리고 1996년까지 25년간 수술받은 심장병 어린이는
 567명이었고
그중 13명이 생명을 잃었다.
하루아침에 방송에서 퇴출된 나는 집 밖을 못 나갔다. 
3개월 만에 무죄판결이 났지만
판결 결과는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처음 오보를 낼 때는
단 한 명의 기자도 내게 확인조차 하지 않고 썼으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간 줄로 알 것 아닌가. 
환장할 것 같았다.
좋은 일 한다고 수술해주고 욕 먹고 나쁜 놈 되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추기경님이 오셔서
"눈이 덮였으니 쓸지 말고 떠나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수중에 남은 돈 20만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관광버스 안내원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 
1년 만에 귀국하여 딸을 시집보내면서 한참을 울었다. 
 남 돕는 일은 다시는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 
1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각난다. 
담당 형사가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살았어요? 
한 푼이 없네요"라고 했다.
담당 검사는 "다시 훈장을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솔직히 지금도 원수를 용서하라는 성경 구절을 
이해할 수 없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나 아프게 하고 자신은 호의호식하던 사람은 끝이 안 좋았다.
아프고 망한 뒤 세상을 떠났다. 
대나무가 마디를 형성하려면 아픔이 겹쳐 바람소리에 운단다. 
요즘 나는 보너스로 인생을 살고 있다.
              옮긴 글